[이정호 칼럼] 대북 낙관론이 불러올 비극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결말은 처참했다. 비극의 절정은 2020년 6월 16일 북한이 감행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였다. 이튿날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에는 남북 화해의 상징으로 내세운 4층짜리 건물이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장면이 담겼다. 국민 혈세 170억원이 투입된 시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에도 정부는 마땅한 대응 수단을 찾지 못했다. 대화와 선의로 북한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얼마나 허황된 이상론인지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북한의 대남 강경 노선이 본격화한 분기점은 2019년 2월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른바 ‘하노이 노딜’이었다. 김정은은 평양에서 중국 단둥을 거쳐 베트남 하노이까지 4500㎞를 꼬박 60시간 동안 전용 열차로 달려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담판해 대북 제재를 풀고 핵보유국 지도자 지위를 인정받으려던 승부수가 물거품이 된 것이다. 북한이 절대적 권위로 떠받드는 소위 최고 존엄에도 금이 갔다.

하노이 노딜의 충격파는 남북 관계 전반으로 차례차례 번져갔다. 김정은은 분풀이의 화살을 남쪽으로 돌렸다.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는 원색적 표현까지 동원하며 우리 정부를 맹비난했다. 미·북 정상회담의 판을 깔고 중재자를 자처하던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 관계 진전이 미·북 협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남북 관계 개선을 견인한다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선순환 구상은 완전히 동력을 잃었다.

군사적 긴장 완화라는 기대마저 정반대 결과로 돌아왔다. 북한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직후 비무장지대(DMZ) 민경초소 복구와 접경지역 군사훈련 재개 등을 담은 이른바 ‘4대 군사행동 계획’을 발표했다. 2023년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를 선언한 뒤에는 철거한 감시초소(GP)를 복구하고 전선을 요새화하는 움직임도 본격화했다. 지난달 북한의 DMZ 지뢰 도발로 우리 장병 3명이 부상한 사건 역시 이 같은 군사적 긴장 고조와 무관치 않다.

이런 상황은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 연설에서 제시한 3단계 비핵화 구상의 실효성을 떨어뜨린다. 3단계 비핵화 구상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이를 축소한 뒤,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평화 정책이다. 이 구상에는 핵 동결에 대한 상응 조치로 대북 제재 일부를 완화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단계적 비핵화는 현실적인 해법처럼 보이지만, 북한의 기만·교란 전술로 점철된 과거 협상의 실패를 되풀이할 위험이 크다. 북한은 단계별 비핵화 약속을 뒤집거나 이행을 거부할 수 있지만, 한 번 완화된 제재를 되돌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역시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보다 제재 완화에 무게를 두다가 미국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한 측면이 크다.

대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대화 자체가 성과일 수는 없다. 평화를 명분으로 대북 제재라는 협상 지렛대를 먼저 내려놓는 것은 북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가장 강력한 수단을 잃는 것이다. 선(先)비핵화든, 단계적 비핵화든 북한의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와 국제사회의 확실한 검증이 선행돼야 한다. 그다음 순서가 그에 상응하는 단계적 제재 완화다. 합의 위반에 책임을 묻고 제재를 복원할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북한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는 이미 대화나 선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특수 상황이 돼버렸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론에만 기대는 순간 새로운 비극의 막은 다시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