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알래스카 LNG로 시작된 對韓청구서, 결국은 반도체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외에 미국에 두 번 더 ‘핵폭탄’을 맞았다. 1985년 9월 플라자합의와 1년 뒤 미·일 반도체 협정. 이 혹독한 경제 압박의 충격은 물리적 원폭에 못지않았다.

플라자합의 즈음 미국의 연간 무역적자 1200억달러 중 460억달러가 대일 적자였다. 달러당 240엔 정도였던 환율은 단 2년 만에 120엔으로 두 배로 절상됐다. 미·일 반도체 협정은 일본에 더 큰 후유증을 남겼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세계 D램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미국 반도체의 자존심 인텔이 메모리 사업을 포기한 상황에서 뽑힌 칼이다. 일본 기업들의 원가를 공개해 일정 가격 밑으로는 팔지 못하게 하고, 일본 반도체 시장의 20%, 후에는 30%까지 강제 개방하도록 했다.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중 6개를 차지했던 일본 기업들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기세등등하던 일본이 미국의 심기를 거슬린 일이 여럿 있었다. 록펠러센터 매입, 컬럼비아·MCA 영화사 인수, 페블비치 골프장 매입 등은 감정을 자극하는 정도였지만, 군사·안보 측면에서 역린을 건드린 사건은 미국이 간과하지 않았다. 도시바가 코콤(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 통제를 위반해 소련 해군에 잠수함 소음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공작 기계를 우회 수출한 것이 탄로 나 미 의회에서 도시바 제품 폐기식과 함께 수입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와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함께 쓴 국뽕류의 책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중 한 대목이 당시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약 일본이 미국에 반도체 칩 공급을 중단하고 대신 소련에 팔겠다고 선언한다면, 그 순간 군사력의 균형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다.” ‘날 잡아먹을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배신감에 미국은 반도체 협정의 압박 강도를 높였고 세계 최강 일본의 D램산업은 결국 해체 지경에 이른다.

요즘 한국 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는 미국의 투자 압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특유의 고압적이고 일방적으로 기정사실화하는 스타일이 상당히 부담스럽다. 미국 관련자조차 권유하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사업성이 불투명한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개발 사업은 한국 1년 예산의 10분의 1에 가까운 500억달러가 자칫 매몰 비용이 될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다.

트럼프 정부의 투자 압박과 맞물린 시점에서 주목되는 문건 하나가 있다. 미 하원 미·중 전략경쟁 특별위원회 존 물레나르 위원장(공화당)이 트럼프 내각 인사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미국 의회 내에서 대(對)중국 정책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쓴 글로, 받은 이들은 전쟁부(국방부) 장관, 상무장관, 미국무역대표부 대표 등 군사·통상 분야의 핵심들이다. 편지 요지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태도 변화가 미국의 이익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어 모니터링 및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 의회 내 대중 봉쇄정책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이 중국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동맹인 한국 정부의 태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 서한에는 1980년대 일본 도시바의 코콤 위반 사건 때 미국이 느낀 배신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힐 사례도 제시돼 있다. 쿠팡 사태와 관련해 한국 규제당국이 알리, 테무 등 중국 기업에는 느슨한 조처를 한 반면 쿠팡에는 11개 기관이 다각적·공격적 단속으로 충격적 규모의 벌금을 부과했다는 것이다. 워싱턴 내 한국 인식의 일면이 엿보인다.

에너지 분야가 주류를 이루는 트럼프의 ‘대한(對韓) 청구서’는 종국에는 반도체로 귀착될 것으로 보인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여러 차례 시사한 바 있다. 일각에선 800조원 호남반도체 추진이 미국을 더 자극했다는 시각도 있다. 대만 TSMC의 대미 투자는 350조원, 반면 삼성은 60조원, SK하이닉스는 5조원대다. 미국은 일본, 한국으로 옮겨간 메모리산업의 유턴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의 위상이 올라갈수록 예의 주시하는 이도 그만큼 많아진다.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는 고차방정식이 돼가고, 우리의 언행도 더 치밀해져야 한다. 1980년대 한때 ‘NO’라고 외친 일본은 호된 경험 뒤로는 미국에 근 40년째 별소리를 못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