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이 톤당 3만 원에 육박했다. 제4차 계획기간의 무상할당 축소와 유상할당 확대가 가격 재평가를 이끌고 있지만, 얇은 거래 기반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
[한경ESG] 이슈
국내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이 톤당 3만 원에 육박했다. 한때 1만 원 안팎에 머물며 가격 신호가 약화됐다는 평가를 받던 배출권 시장이 최근 빠르게 반등하는 모습이다. 배출권 가격은 올 들어 상승 흐름을 이어가다 5월 말 2만 원을 넘어섰고, 6월 8일에는 2만8800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8월 8000원대였던 가격이 1년도 안 돼 세 배 이상 오른 셈이다.
가격 회복은 배출권거래제 정상화 측면에서 긍정적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배출권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형성돼야 기업이 고효율 설비, 연료 전환, 저탄소 공정 투자 등을 검토할 유인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거래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배출권 가격이 단기간에 오를 경우 기업 입장에서는 감축 투자 신호보다 원가 불확실성이 먼저 커질 수 있다. 배출권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한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가격 상승의 직접적 배경으로는 2025년 이행연도 배출권(KAU25) 제출을 앞둔 수급 불안이 꼽힌다. 배출권거래제 참여 기업은 오는 8월까지 실제 배출량에 해당하는 배출권을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실제 배출량이 보유 배출권보다 많으면 부족분을 시장에서 사야 한다. 반대로 배출권이 남으면 매각하거나 다음 이행연도로 이월할 수 있다.
최근 가격이 오르면서 배출권을 보유한 기업들 사이에서는 매각보다 이월을 우선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시장에 나오는 물량은 줄어든 반면 정산을 앞두고 배출권을 확보하려는 매수세가 이어지면서 가격 상승폭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하상선 에코아이 전무는 “배출권이 남는 업체는 이월 가능한 물량을 최대한 확보한 뒤 반드시 팔아야 하는 물량만 시장에 내놓는 상황”이라며 “배출권을 사야 하는 업체들은 추가 가격 상승을 우려해 서둘러 물량 확보에 나서면서 단기 과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 상승보다 더 큰 문제는 변동성
배출권 가격은 올해 하반기에도 높은 상승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2026~2030년 적용되는 제4차 계획기간에는 제3차 계획기간보다 기업에 무상으로 배정되는 배출권 물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는 발전 부문을 중심으로 유상할당 비율을 단계적으로 높이고 있다.
하 전무는 “제4차 계획기간에는 제3차 계획기간보다 무상 할당량이 18~20% 정도 부족해질 것”이라며 “일부 발전사는 오늘 배출권 가격이 가장 싸다고 판단하고 2025년 정산 수요뿐 아니라 향후 부족분까지 미리 사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말 배출권 가격을 2만5000원 수준으로 예상했으나 이미 이를 넘어섰다”며 “올해 하반기 3만 원대까지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제출 마감 시점을 전후로 변동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올해 배출권이 남는 업체는 배출권 순매도량에서 매수량을 뺀 물량의 5배까지 이월할 수 있다. 이월 한도를 넘는 물량은 결국 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다. 제출 기한 전까지는 보유 기업이 매각을 미루며 가격을 지탱할 수 있지만, 8월 말이 가까워질수록 이월하지 못하는 물량이 공급으로 풀릴 가능성이 있다.
배출권 가격이 일정 수준 이상 형성되는 것은 탄소 감축 투자를 유도하는 데 필요하다. 가격이 지나치게 낮으면 기업은 설비 투자보다 배출권 매입을 택하기 쉽다. 배출권을 사는 편이 설비를 바꾸는 것보다 싸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격이 안정적으로 형성되면 감축 투자의 경제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가격이 단기간에 급등락하면 기업은 탄소 가격을 장기 투자 기준이 아니라 단기 비용 변수로 인식할 수 있다.
이에 정부도 변동성 관리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4월 배출권거래법 시행령을 개정해 제4차 계획기간에 도입되는 시장안정화 예비분 제도를 법제화했다. 배출권 가격이나 시장 물량이 사전에 정한 기준을 벗어날 경우 정부가 미리 확보한 예비분을 활용해 경매 공급량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유럽연합(EU)과 미국 캘리포니아 등 한국보다 앞서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한 시장에서도 유사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시장안정화 예비분은 배출권 할당위원회 심의를 거쳐 공고되는 가격 범위를 기준으로 작동한다. 배출권 가격이 정부가 정한 예비분 공급가격 이상으로 오르거나 경매 보류가격 이하로 떨어질 경우 예비분을 활용해 시장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 기후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가격 범위와 운영 방식은 할당 대상업체 등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과 전문가 논의를 거쳐 오는 8월까지 확정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변동성 줄이기 위해 금융상품 도입해야”
정부의 예비분 공급 조절만으로 변동성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배출권 시장 참여자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현재처럼 실제 배출권 제출 의무가 있는 기업 중심으로 시장이 움직이면, 정산기마다 수급이 한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배출권을 사야 하는 기업은 한꺼번에 매수에 나서고, 배출권이 남는 기업은 가격 상승을 기대하며 매도를 늦출 수 있다.
전문가들은 배출권 시장의 변동성을 줄이려면 시장 참여자를 넓히고 금융상품을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해 11월 배출권 위탁거래가 시작되면서 증권사를 통한 거래 기반은 마련됐다. 정부는 배출권 가격과 연동한 상장지수증권(ETN), 상장지수펀드(ETF), 선물시장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배출권을 기초자산으로 한 금융상품이 도입되면 기업은 가격 변동 위험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배출권 부족이 예상되는 기업은 선물이나 연계 상품을 활용해 미리 가격을 고정할 수 있다. 배출권을 보유한 기업도 현물 매각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가격 위험을 조정할 수 있다. 시장 참여자가 늘고 거래 수단이 다양해지면 정산기마다 반복되는 수급 쏠림도 완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배출권 시장의 향후 과제는 가격 수준 자체보다 예측 가능한 가격 신호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가 시장안정화 장치와 함께 증권사, 금융투자자가 참여할 수 있는 시장 구조를 마련하고 있는 배경이다. 김미현 SK증권 상무는 “배출권 시장은 정책 영향을 크게 받는 영역인 만큼 명확한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배출권을 다양하게 상품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