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이슈 브리핑
대표적 비콥 기업인 파타고니아. 사진=비랩코리아 제공
대표적 비콥 기업인 파타고니아. 사진=비랩코리아 제공


2015년은 인류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집단적 약속을 새긴 해였다. 파리협정에서 190여 개 국가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억제하겠다고 약속했고, 유엔은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통해 빈곤·불평등·환경문제 해결에 전 세계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 약속의 무게 이상으로 엄중하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글로벌 공조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흔들리는 사이, 인공지능(AI) 기술의 급속한 확산은 새로운 환경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 더욱이 2024년,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1.5℃ 상승에 도달했다는 관측이 나오며, 우리가 설정한 ‘위험의 마지노선’은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닌 현재의 현실이 되었다.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흐름은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면서 한편에서는 속도가 늦춰지고 일부 후퇴가 관찰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더 깊고 강한 기준과 실천이 형성되며 전체의 방향을 다시 빚어가고 있다. 환경과 사회 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또렷해진 지금,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 그리고 실행력을 바탕으로 ESG의 다음 단계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7개 임팩트 주제로 이루어진 새로운 비콥(B Corp) 표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비콥(B Corp)이다. 비콥은 모든 사람, 지역사회, 지구에 유익이 되는 경제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해 사회·환경 성과 및 책임성·투명성에 대한 높은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에게 부여하는 인증이다. 2026년 4월 기준 105개국에서 약 1만700개 기업이 인증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는 파타고니아, 다논, 네스프레소, 토스뱅크 등의 기업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ESG를 높은 수준에서 실천하고 있는 34개 기업이 인증을 받았다.

비콥 운동을 펼치고 있는 비랩(B Lab)은 지난해 비콥 인증 기업에 적용되는 새로운 표준을 발표했다. 표준은 7개의 임팩트 주제를 담았다. △기업의 목적과 이해관계자 지배구조 △공정한 노동 △정의·형평성·다양성·포용성 △인권 △기후행동 △환경관리 및 순환 △대정부 관계 및 집합적 행동이다. 2025년 4월 공개된 이번 표준은 2026년 3월부터 신규 인증 및 재인증 기업에 적용된다. 이는 2006년 비랩 창립 이래 가장 큰 변화로 평가된다.

이번 표준 개편은 약 4년에 걸쳐 70여 개의 포커스 그룹, 전문가 인터뷰가 진행되었으며, 67개국에서 3000명 이상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2만6000건이 넘는 정성적 피드백이 반영되었다. 또한 글로벌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기구(GRI), 유럽지속가능성공시기준(ESRS), 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 등 기존 글로벌 프레임워크와의 정합성을 높여 데이터와 방법론을 통합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은 중복적인 보고 부담을 줄이고 형식적 공시를 넘어 실제 ‘임팩트 실행’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비콥' 새 표준 나와...ESG,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바뀐 비콥 표준의 네 가지 특징

비콥이 제시한 7가지 임팩트 기준은 기존 ESG와는 내용이 유사하면서도, 접근 방식과 작동 원리에서 분명한 차별점을 보여준다.

첫째, 선택적 우수성에서 필수적 책임으로의 전환이다. 기존 ESG는 해당 기업 가치에 영향을 끼치는 리스크와 기회 요인에 대한 평가를 보완할 수 있는 구조인 반면, 비콥 표준은 목적과 지배구조, 노동, 다양성, 인권, 기후, 환경, 정책 참여에 이르기까지 7개 영역 모두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요건을 충족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일부 영역의 ‘잘함’이 다른 영역의 ‘부족함’을 상쇄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기업 활동 전반에 걸친 균형 잡힌 책임을 강조한다.

둘째, 결과 중심 평가에서 과정과 시스템 중심 관리로의 이동이다. ESG가 주로 공시 지표와 성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평가되는 반면, 비콥 표준은 의사결정 구조, 이해관계자 참여, 지속적 모니터링과 개선 체계 등 기업 내부의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는 데 초점을 둔다. 예를 들어 ‘기업의 목적과 이해관계자 지배구조’나 ‘공정한 노동’ 기준은 단순한 결과 수치가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구조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셋째, 개별 기업 단위에서 가치사슬과 시스템으로의 확장이다. 기존 ESG가 개별 기업가치 관점에서의 관리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었다면, 비콥 표준은 인권, 환경, 다양성 기준을 기업의 직접 운영을 넘어 공급망과 가치사슬 전반으로 확장하고, 더 나아가 ‘대정부관계 및 집합적 행동’ 항목을 통해 기업이 정책 환경과 산업 생태계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기업의 역할을 시스템 변화를 위한 하나의 주체로 확장한다는 의미다.

넷째, ‘측정’에서 ‘행동’으로의 무게 이동이다. ESG가 공시와 평가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면, 비콥 표준은 기후 행동 계획, 인권 리스크 대응, 순환 설계 도입 등 구체적인 실행을 전제로 한다. 특히 기후 행동에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1.5℃로 제한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실행 가능한 계획이나 환경 관리에서 순환성과 책임 있는 조달을 강조하는 부분은 기업이 실제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렇듯 비콥의 7가지 임팩트 기준은 ESG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한 단계 진화시킨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체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체계로, 그리고 ‘개별 기업의 성과’에서 ‘구조적 시스템의 변화’로 시야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비콥 표준은 ESG의 다음 단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콥 표준 변화의 핵심적 가치를 단 하나의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구조적 변화(System Change)’다. 이는 개별 기업의 성과 개선 접근을 넘어, 시장의 규칙과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기 위한 접근이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비즈니스 생태계 역시 ESG를 통해 어떤 변화를 만들 것인가를 재정립해야 하는 전환의 시점에 서 있다. ‘평가 대응형 ESG’에서 벗어나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사회·환경 성과 및 책임성·투명성에 대한 높은 기준을 결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ESG 기준은 기업가치 제고를 넘어 비즈니스 전반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가장 시급한 사회·환경 문제에 대해 기업이 실제 행동을 이끌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ESG는 ‘준수(compliance)’의 문제가 아니라 ‘성과(impact)’의 문제로 전환되고, 기업이 사회와 환경 속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ESG를 ‘잘하는 기업’을 가려내는 도구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기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이 임계점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서 기업은 더 이상 관망자가 아니라 구조적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평가를 넘어서고, 선언을 넘어 실행으로 나아가며, 개별 성과를 넘어 시스템을 바꾸는 방향으로 말이다. ESG는 이제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더 높은 기준을 받아들이고, 그 기준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기업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서진석 비랩코리아 이사
'비콥' 새 표준 나와...ESG,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