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예술가들은 그림이 팔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림 파는 것을 아주 무서워해요.”

‘숯의 작가’ 이배(70)의 말이다. 작품은 팔릴 때는 꽃이지만, 작가가 바르게 가지 못하면 화살이 돼 돌아온다는 경계다. 그래서 그는 시장의 환호 대신 작업실에서의 시간을 택한다.

이배 작가가 지난 10월 17일 프랑스 파리 페로탕 갤러리에서 개인전 ‘어텐딩(Attending)’을 열었다. 2018년 메가 갤러리 페로탕에 합류한 뒤 이곳에서 연 아홉 번째 개인전이다.

한국경제 아르떼가 파리에서 그를 만났다.
이배 작가 /ⓒ이정우
이배 작가 /ⓒ이정우
전시장 화면 속에서 작가는 논 한가운데 서 있다. 나뭇가지를 묶어 만든 빗자루로 흙을 쓸고, 땅에 펼친 흰 천을 매만진다. 한국의 논에서 찍은 신작 영상 ‘비커밍(Becoming)’은 그의 작업이 어디를 향하는지 묵묵히 보여준다. 영상 속 자신의 실루엣을 숯 조각으로 채운 ‘불로부터-퍼포먼스’, 수천 개의 사무용 스테이플을 촘촘히 박아 획을 이룬 ‘붓질-스테이플’도 함께 걸렸다. 이번 신작은 작가의 육체노동과 고된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꽃으로 팔리고 화살로 돌아오는 작품

이배 'BRUSHSTROKE-STAPLES 9AC' 2026. 캔버스에 스테이플, 220×152㎝. /작가 및 페로탕 제공
이배 'BRUSHSTROKE-STAPLES 9AC' 2026. 캔버스에 스테이플, 220×152㎝. /작가 및 페로탕 제공
미국 미술평론가 폴 래스터는 그가 시장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길을 우직하게 걷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이배는 그림이 팔리지 않을 때는 팔고 싶은 열망이 강하지만, 막상 시장에 들어가 구조를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고 했다. 작품이 도리어 작가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사람들은 작품이 좋아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참 지나서 보면 그 작가의 세계를 사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가 바른길을 가지 못하면 그 작품이 작가를 공격하는 구실이 돼요.” 그래서 예술가는 많이 팔리는 작가보다 새로운 길을 계속 열어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을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사는 게 아니에요. 이해관계에 얽매인 우리 삶에는 없는 어떤 순수성을 사는 거죠.”

이배 'BRUSHSTROKE S7' 2026. 브론즈, 215×40×38㎝. /작가 및 페로탕 제공
이배 'BRUSHSTROKE S7' 2026. 브론즈, 215×40×38㎝. /작가 및 페로탕 제공
그 순수성의 뿌리는 숯에서 시작됐다. 1990년 파리로 건너간 그는 이듬해 처음 숯을 손에 쥐었다.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시기였어요. 시간은 많은데 값비싼 재료를 감당할 방법이 없었죠. 그러다가 우연히 바비큐용 숯을 샀어요. 대학 입시 때 하던 목탄 데생이라도 하자는 마음이었죠.”

그 무렵 이배는 이우환의 조수로도 7~8년간 일했다. 이우환이 파리에 머물 때마다 캔버스 천을 당겨 틀에 씌우는 일을 도우며 거장의 곁에서 예술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으로 익혔다. 오늘날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지향하는 바는 ‘숯’이라는 매체의 특수성에 안주하지 않고 보편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면서도 뿌리를 단단히 내리려는 것, 그렇게 보면 숯은 제게 흔들리지 않는 뿌리입니다.”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며 현재에 머물다

“생의 순환이 이배 예술의 중심에서 맥박친다.” 미국 미술평론가 폴 래스터가 이번 전시 서문에 쓴 첫 문장이다. 래스터는 이번 전시가 ‘기다림’을 펼쳐 보인다고 설명한다.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것이다.” 그 기다림은 이배의 작업 방식 그 자체에 녹아 있다. 그는 소나무와 참나무, 포플러를 직접 태워 숯을 만든다. 나무가 숯이 되는 시간을 지켜보는 일은 앞으로 올 작품을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이다.
이배 신작 ‘비커밍(Becoming)’. /페로탕 파리 홈페이지
이배 신작 ‘비커밍(Becoming)’. /페로탕 파리 홈페이지
파리 전시에 앞서 그가 프랑스 남부 볼리유엉루에르그 수도원에서 개인전 ‘기다리며(En attendant)’를 연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파리에서 기차로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외딴곳이다. 그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어렵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오히려 이곳에서 전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전시는 세상에 보여주고 평가받는 일이지만, 평가가 예술을 하는 동기는 아니잖아요. 수도원은 그런 시선을 걷어낸 느낌이 있어서 좋았어요. 작업실에서 홀로 제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줬어요.” 천장 높이가 30m쯤 되는 12세기 성당. 작가는 그곳에 25m짜리 그림 ‘붓질: 야곱의 사다리’를 걸고, 한국에서 제작해 배로 실어 온 10m 높이의 브론즈 조각을 세웠다. 이배 자신도 하루에 한두 명이나 찾아올까 생각했지만, 전시를 보고 간 이들의 입소문이 이어졌다. 프랑스 문화재청장이 수도원을 널리 알려줘서 고맙다고 연락했을 정도다.

작업 앞의 기도, 매일의 순환

흔들리는 내면을 붙잡고 뿌리를 지키는 그의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엄격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동일한 작업실에 가서 싫든 좋든 있어야 해요. 아파서도 안 되고, 약속이 있다고 비워서도 안 됩니다.” 슬럼프에 관해 묻자 담담한 답이 돌아왔다. “슬럼프는 매일 찾아와요. 그러니 늘 그것과 같이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작업이 막힐 때마다 그는 기도를 올린다. “생각으로 작품이 되는 게 아니라서 기도해요. 기도 없이 한 작품 앞에서는 절망할 때가 많은데, 기도를 많이 한 작품은 절망을 좀 덜 하게 되고 위로가 돼요. 작품 하나가 제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과정이니까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을 만났을 때도 그는 같은 사유를 나눴다고 했다. “작업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길래 기도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농부가 기도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 그냥 노동자’라고 하더군요. 평소 제 생각과 깊이 통했습니다.”

그는 현대미술이 지성만으로 미술이 성립함을 입증하려 애쓰면서 다양성은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래의 영성은 크게 쇠퇴했다고 진단한다. 매일 반복되는 작업실 출근이 지겹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매일 새로워요. 매일 똑같은데도 자기 안의 새로움을 일깨울 수 있는 시간, 그런 게 제게는 기도입니다.”

파리=김인애 럭셔리&컬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