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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덜어내니 비로소 보이는 '가능한 사랑'
김지용 촬영감독이 담아낸 '이창동의 세계'
최근 한국경제신문 아르떼와 만난 김 감독은 이를 두고 “긴장감과 불안을 주려고 의도한 촬영”이라고 설명했다. “이창동 감독은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는 것 같은 화면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꾸미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요.”
충무로가 신뢰하는 이름
그의 필모그래피 대표작으로 ‘남한산성’을 앞단에 놓는 영화 애호가가 적지 않다. 혹한 속 고립된 조선 조정의 절망을 차가운 푸른빛과 촛불의 희미한 온기로 그려냈다. 김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18년 ‘촬영 분야 아카데미’로 불리는 폴란드 카메리마주 국제영화제에서 알폰소 쿠아론 등 쟁쟁한 영화인을 제치고 한국인 최초로 대상 격인 황금개구리상을 받았다.
영화 촬영으로 잔뼈가 굵은 김 감독에게 ‘가능한 사랑’은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다. 그는 “이 감독의 영화를 워낙 좋아했고, ‘내가 이창동 영화를 찍을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다”며 “어떤 내용인지 파악도 안 됐지만, ‘일단 하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이창동 영화를 찍을 일이 있을까’라는 속내에는 중의적 의미가 담겼다. 이창동이라는 영화인에 대한 동경인 동시에 현실적 거리감이었다. 그간 김 감독의 작업은 인상적인 명암 대비와 스타일리시한 구도로 주목받았다. 인물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도 카메라의 존재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이창동의 연출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그의 카메라가 영화적으로 쓸모 있겠다는 감이 왔다고 했다.
“사실 촬영을 오래할수록 일관성(스타일)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고, 그게 나라는 사람을 찾는 이유가 될 테죠. 그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은데 ‘가능한 사랑’은 그걸 시도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분히 해볼 만한 경험이겠다 싶었던 거죠.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의 복잡성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덜어낼수록 정교해진 화면
촬영을 덜어내다 보니 직접 연출에 관여하는 비중은 높여야 했다. 영화의 위기감이 고조되며 절정으로 치닫는 장소인 상우(조인성) 부부의 별장을 짓는 과정이 대표적이다. 이 감독이 부동산 유튜브를 훑은 끝에 찾아낸 부지에 직접 세트를 세웠는데, 창문 개수·방향 등 설계 전반에 김 감독이 참여했다. 그는 “해의 방향을 고려한 집의 위치, 실내 벽지 색깔 등에 모두 관여해 만들었기 때문에 조명을 적게 쓰면서 자연스러운 화면을 담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미옥이 호석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장면에도 그의 고민이 녹아 있다. 사실 이 장면은 이창동 영화를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대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감독이 그간 ‘플래시백’(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기법)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시나리오 작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 감독은 플래시백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이번 영화에는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며 “다만 플래시백 같지 않게 덤덤히 넘어가길 원한 만큼 현재와 과거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고 말했다.
필터를 씌우거나 조명을 달리하는 일반적인 접근 방식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김 감독은 1990년대 여름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는 “과거를 어떻게 다시 구현할 수 있을까를 두고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 작가와 논의한 끝에 의상과 분장에 신경 쓰기로 했다”며 “촬영 기술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렇게 관여하며 과거 장면을 잘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말미의 바다 수영 장면도 빼놓을 수 없는 기억이다. 미옥이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로 뛰어들자 상우도 덩달아 나체로 헤엄쳐 들어가는 신으로, 이 감독조차 어떻게 찍을지 쉽게 답을 내지 못한 장면이다. 김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바다에 들어갔다. 그는 “잠망경 같은 장비를 써서 카메라가 수면 위아래를 오갈 수 있게 하고, 배우들은 멀리 떨어지지 않게 고무줄로 연결했다”며 “실제로는 제자리에서 수영하는 건데, 파도가 치니 화면에선 마치 먼바다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장면이 꼭꼭 눌러둔 해방감을 만끽하는 인물의 모습을 연출하려는 의도였다면 꽤 절묘하게 촬영한 셈이다.
‘가능한 사랑’은 넷플릭스에 공개되기 전 극장에서 관객과 만났다. 반응은 흥미롭다. 김 감독은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나 된다고 경고했는데, 지루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았다”며 “그간 촬영한 영화 중 이렇게 다양한 피드백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그래서일까. 김 감독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도 안 해본 작업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가능한 사랑’처럼 익숙하지 않은 것을 계속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