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소리가 진실을 밝히려는 커스틴 역을 연기하며 객석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배우 문소리가 진실을 밝히려는 커스틴 역을 연기하며 객석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진실에는 여전히 힘이 있을까. 사람들은 무엇이 사실인지 가리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누군가는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고, 누군가는 시기와 질투로 불편한 사실을 말한 사람을 공격한다. 그리고 그 공격은 SNS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된다.

진실 밝힌 자가 '적'이 되는 사회…연극 '에너미'가 던진 질문
연극 ‘에너미’는 이런 현실 속에서 진실의 가치를 다시 묻는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이준우 서울시극단 단장(41·사진)은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인 것 같다”며 “‘에너미’는 진실을 추구하다 외롭게 홀로 남겨진 인물을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에너미’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고전 ‘민중의 적’을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가 각색한 작품이 원작이다. 강훈구 작가가 번역·윤색했다.

이야기는 쇠락한 소도시의 리조트 개장일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다룬다. 도시의 시장 보니에게 이날은 오랜 노력의 결실을 보는 날이다. 그런데 동생 커스틴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고 온다. 언니 몰래 의뢰한 수질 검사에서 수돗물의 독성 물질 오염이 확인됐고, 이를 기자에게도 알렸다는 것이다.

갈등은 커스틴이 오염 사실을 SNS에 공개하면서 마을 전체로 번진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수질 오염의 진위보다 커스틴의 자격과 과거 행적으로 옮겨 간다.

이 단장은 진실을 알리려던 사람이 도리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는 “커스틴이 밝히려는 진실보다 그를 둘러싼 말들이 더 커지고, 진실을 덮어가는 과정이 보였으면 했다”고 강조했다.

무대는 여론몰이의 폭력성을 직관적으로 시각화했다. 층층이 쌓인 철제 구조물 위 여러 화면에 라이브 방송과 댓글이 쏟아져 커스틴을 에워싼다. 유튜브 등의 화면 형식에 맞춰 뜨던 댓글은 어느 순간 형형색색으로 틀을 벗어나 화면을 가득 메운다.

공연 후반부에는 관객도 마을 주민의 자리에 놓인다. 객석에 조명이 비치고 배우가 박수를 유도한다. 개장식에 호응하던 관객은 이윽고 자신들을 향한 커스틴의 외침을 듣는다. “진짜 적은 여러분”이라는 것이다. 이 단장은 “이야기가 연극 안에만 머물지 않고 관객의 피부 가까이에서 느껴졌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 단장이 이해한 커스틴은 처음부터 투쟁을 결심한 영웅이 아니다. 그는 “장롱에 유니폼을 넣어두고 회사원으로 살려다 사건에 휘말려 다시 배트맨 옷을 입게 된 인물”에 빗댔다.

커스틴을 번갈아 연기하는 문소리와 이봉련의 접근 방식은 다르다. 문소리가 거친 에너지로 활동가 출신의 단단함을 드러낸다면, 이봉련은 두려워도 진실을 말하기 위해 두 발로 버티는 인물을 연기한다.

이 단장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로 ‘동시대성’을 꼽았다. 그는 “최근 SNS 여론의 흐름이 작품 속 상황과 꼭 닮았다”며 “관객이 무대 위 이야기를 통해 현실 속 자신을 깊이 있게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4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