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렵의 음악가는 조바심을 내기 쉽다.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던 10~20대 시절을 지나 한 단계 성숙한 음악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지지만, 세계 무대의 관문인 콩쿠르는 나이 제한 탓에 더 이상 출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슈만의 환상소품집 Op.12 중 1곡 'Des Abends(저녁에)'를 연주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슈만의 환상소품집 Op.12 중 1곡 'Des Abends(저녁에)'를 연주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30)의 콩쿠르 도전은 이런 의미에서 대담했다. 그는 지난해 8월 제18회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마스터 콩쿠르에 지원하며 실전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연주해 본 적 없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결선 곡으로 정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더불어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 난곡을,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콩쿠르 최종 라운드에서 꺼내 들기로 한 것이다.

승부수는 통했다. 이번 결선 무대 파이널리스트 여섯 명 중 세 명이 이 곡을 골랐지만, 박진형은 벨라루스 출신 피아니스트 울라지슬라우 칸도히와 함께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역대 한국인 참가자 가운데 가장 높은 성적이다. 앞서 피아니스트 손열음(2005년)과 조성진(2014년)은 3위를 수상했다.

지난 9월 막을 내린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공동 2위에 오른 박진형을 최근 서울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만났다. 그는 "다른 대회와 마찬가지로 수상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1년 가까이 이어진 콩쿠르 여정이 끝나 시원섭섭하다"고 웃었다.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더 많은 무대를 향한 도전

박진형은 2016년 프라하 봄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1위를 차지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피아니스트다. 현재 독일에 체류하며 세계적인 피아노 명문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예원학교·서울예고·연세대를 거쳐 독일 하노버에서 5년 넘게 유학 중이다.

서른에 접어든 박진형에게 이번 콩쿠르는 마지막 도전이 될지 모른다. 국제 콩쿠르 대부분이 적게는 32세, 많게는 35세를 출전 마지노선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에 콩쿠르에 나가지 못하기 전에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었어요. 콩쿠르 입상으로 얻을 수 있는 유럽 무대 연주 기회도 욕심났고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열리는 루빈스타인 콩쿠르는 올해 곡절이 많았다. 지난 2월 이스라엘-이란 전쟁이 터지며 참가자들이 현지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1·2라운드는 지난 4~5월 독일 크론베르크에서 치러졌고, 결선은 9월로 연기됐다. 본선 통과 후 결선까지 넉 달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박진형은 "결선까지 시간이 널널해 다른 콩쿠르보다 덜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도 "콩쿠르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보니 쉬면서도 제대로 쉴 순 없었다"고 돌이켰다.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중요한 대회였지만, 결선에 오른 박진형에게선 여유가 묻어났다. 긴 머리칼을 시원하게 뒤로 넘긴 그는 연주를 시작하기 전 지휘자를 향해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박진형은 "긴장의 정도가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며 "최대한 '마지막 무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가장 낯선 곡을, 가장 큰 무대에서

박진형은 결선에서 총 세 곡을 연주했다.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삼중주 4번 '둠키'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그리고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드보르자크와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손에 익은 곡이었지만, 프로코피예프만은 예외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이 곡을 처음 듣고 '이런 곡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 멋있어서 언젠가 꼭 한번 연주해보고 싶었던 곡이었어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악보 전체가 도약의 연속이다. 고도의 테크닉은 물론 연주자의 감정마저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엄청 파워풀하면서도 슬픈 곡이에요. 그동안 가볍고 화려하고 우아한 레퍼토리 위주로 연주해왔기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죠. 곡에 대한 청사진은 확실한데, 제 손을 통해 그 소리가 나올 수 있을지 상상이 잘 안됐어요."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그럼에도 박진형은 정면 돌파를 택했다. 까다롭다고 악명 높은 곡인 만큼, 연주만 잘 해낸다면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취미로 뛰는 축구에서 '수비수'를 맡고 있다는 박진형은 피아노 앞에서만큼은 과감한 승부수를 띄우는 '공격수'였다. 그가 결선 전 공식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한 경험은 지난 4월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잔인하면서도 슬픈 전쟁 영화 같은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어요. 1악장 카덴차(독주 부분)를 가장 좋아하는데, 여기선 인생에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비극을 떠올렸어요. 최대한 아름답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노래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지금까지 제가 해 온 것과는 반대되는 방향이었죠."

박진형에게 이번 콩쿠르 수상은 단순히 타이틀 하나를 추가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프라하 콩쿠르 우승 이후 10년간 그려온 자신의 음악 세계를 한 뼘 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프로코피예프를 치면서 '나한테 이런 면도 있구나'를 느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이런 강렬한 레퍼토리를 만난다 해도 피하지 않을 것 같아요."

"클래식함 지키는 연주자 될 것"

요즘 그의 마음은 다시 쇼팽을 향하고 있다. "뭔가에 빠지면 깊게 몰입했다가도 어느 순간 확 질려버리는 편이에요. 어떤 작곡가에 빠졌다가도 많이 연주하고 나면 질려버려서 항상 새로운 걸 찾게 돼요. 6~7년에 한 번씩 쇼팽의 시기가 돌아오는데 지금이 그래요. 요즘은 쇼팽의 마주르카나 왈츠 같은 가볍고 산뜻한 곡들이 좋아요."

박진형이 피아노를 치는 이유는 단순하지만 본질에 가장 가깝다. "제가 좋아서 하는 게 가장 큰 이유 같아요. 이번 무대에선 어떻게 연주해볼지 생각해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하면서 '아, 이런 맛이 있구나' 알게 되는 느낌이 되게 좋거든요." 앞으로 선보이고 싶은 작품으로는 라벨과 베토벤, 브람스 등의 음악을 꼽았다.

박진형의 정신적 멘토 중 한 명은 피아니스트 백건우(80)다. 두 사람의 인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백건우는 박진형, 김홍기, 김도현 등 세 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들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백건우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포 피아노(4 Pianos) 무대를 올렸다. 이후 박진형은 파리에 있는 백건우의 자택에 찾아가 음악적 조언을 구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박진형이 백건우로부터 자주 듣는 말은 "흥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선생님이 저한테 매번 하는 말씀이에요. '연주할 때 너 자신을 앞세우지 말고, 음악이 주인공이 되게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는데, 사실 아직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피아니스트 박진형이 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문경덕 기자
두 사람의 음악적 교감은 다음 달 무대에서도 이어진다. 12월 2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백건우와 영프렌즈' 공연에선 백건우, 박진형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김홍기, 김도현, 선율, 강동휘, 홍석영, 이주언 등이 무대에 오른다. 퍼커션 연주자들과의 이색 협연도 선보인다.

박진형은 콩쿠르 수상에 따른 부상으로 내년 2월 오스트리아, 8월 이스라엘, 12월 일본에서 연주를 펼친다. 그에게 '어떤 피아니스트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자 "얼굴보다 이름과 음악으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요즘 클래식 시장이 점점 상업화되는 것 같아요. 물론 티켓을 팔려면 불가피한 면도 있지만, 본질은 음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클래식함을 지키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콩쿠르는 끝났지만 박진형의 음악적 항해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앞으로도 최대한 저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 다른 한편으론 저 자신을 더 확고하게 찾았으면 좋겠고요. 지금도 제 색깔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른 중견 연주자들처럼 확실한 색깔을 갖고 있진 않은 것 같거든요. 40대가 됐을 때 저만의 색깔이 뭘지, 저도 궁금해요."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