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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기 칼럼] '위장된 축복'이 승자의 저주로 바뀐다면
수출 1조달러·4% 성장 전망
눈부신 경제성적표에도 불안
노동·연금 개혁은 여전히 제자리
반도체 호황에 절박함 사라져
재정에 기대는 손쉬운 처방
지금 성공이 미래의 덫 될 수도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눈부신 경제성적표에도 불안
노동·연금 개혁은 여전히 제자리
반도체 호황에 절박함 사라져
재정에 기대는 손쉬운 처방
지금 성공이 미래의 덫 될 수도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자원의 결핍도 마찬가지다. 석유와 광물이 풍부한 나라가 자원 수출에 안주하는 동안 한국은 사람과 기술에 투자하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길을 택했다. 자원 빈국이라는 약점이 교육과 제조업, 수출 경쟁력을 키우는 동력이 된 것이다.
물론 결핍이 저절로 경쟁력을 키워준 것은 아니다. 수출 주도 산업화, 외환위기 구조조정,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경제 영토 확대에는 기득권의 반발과 정치적 비용을 감수한 결단이 있었다. 위기와 결핍이 기회를 제공했다면, 이를 성장의 동력으로 바꾼 것은 역대 대통령의 정책적 선택이었다.
반면 지금 한국은 과거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위기와 결핍이 아니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초호황의 역설이다. 이달 중후반 수출은 1조달러를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 지난 10월까지 누적 수출액은 9300억달러로 이미 9부 능선을 넘었다. 올해 실질 성장률은 4% 가능성까지 나온다. 4분기 제로 성장에 그치더라도 연간 3.6%다. 정부가 공언한 ‘3·4·5 대도약’(잠재성장률 3%, 수출 4강, 국민소득 5만달러 달성)이 가시권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달러 시대가 열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은 2028년 5만달러 돌파까지 전망한다. 반도체가 이끄는 한국 경제의 성적표는 눈부시다. 재정경제부가 올 하반기 경제운용 방향에 내놓을 눈에 띄는 비전이 없어서 급조했다는 ‘3·4·5 대도약’이 이렇게 쉽다니 내심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수치의 이면에는 다른 그림이 나온다. 최근에 만난 이코노미스트는 세 가지 질문을 정부에 던졌다. “수출 1조달러로 한국 경제가 그만큼 강해졌느냐.” “GDP가 커지면 나랏빚 걱정도 사라지느냐.” 마지막 질문이 아프다. “1인당 소득이 5만달러를 넘는다고 하는데, 국민도 그만큼 부유해졌느냐.”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정책 당국자가 있다면 답해주기 바란다. 반도체를 빼면 모두 사라지는 신기루가 아닐까.
한국갤럽의 지난달 경제정책 평가 조사에서 ‘잘한다’는 응답은 35%, ‘잘못한다’는 응답은 47%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처음으로 넘어섰다. 정부가 잘해서 이룬 성취가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재정은 호황이 가리는 위험을 보여준다. 올해 GDP가 반도체 호황으로 증가하면서 국가부채비율은 50% 밑으로 떨어지겠지만, 빚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복지와 연금 등 경직성 지출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국가부채는 2050년엔 지금의 세 배가 넘는 4057조원으로 불어난다(국회예산정책처).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려스러운 지점은 개혁의 절박함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역사는 많지만, 호황을 도약의 계기로 활용한 전례는 없다. 대통령의 국정 담론에도 노동·연금·의료·교육 개혁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주 52시간제의 경직성은 그대로다.
정부와 정치권의 관심은 당장의 성과를 보여주는 재정 처방에 쏠려 있다. 경기가 부진하면 재정을 풀고, 물가가 오르면 다시 재정으로 가격을 누르는 방식이다. 석유최고가격제가 대표적이다. 올해 재정으로 보전해야 하는 정유사 손실만 최대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재정은 충격을 완화할 수 있지만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구조를 바꾸는 개혁을 대신할 순 없다. 반도체 호황만으로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미스터 쓴소리’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의 경고다.
이재명 대통령이 검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소셜메시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의 호황은 개혁의 실패마저 오랜 기간 가려줄 것이다. 반도체 경쟁에서 이긴 한국이 개혁에서 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승자의 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