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시간을 걷는 시장
길에는 삶이 새겨진다. 발걸음과 목소리, 웃음과 한숨이 켜켜이 쌓인다. 기억과 세월이 머문다. 우리는 길 위에서 시간을 걷는다.

부산 남구 못골시장 골목길에 오랜 향수가 스며 있다. 어릴 적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장을 보러 다녔다. 친구들과 구석구석을 뛰어다녔다. 생선과 채소가 가득한 좌판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도 매주 같은 골목을 지나다닌다. 추억과 정은 여전하다. 어르신과 친구, 선후배들이 “수영아” “행님” 하고 그때 그 시절로 나를 인도한다. 가게에 들러 안부를 나누고 장을 본다. 반찬, 채소 등 비닐봉지에 가득 담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길을 나선다.

긴 세월만큼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함께하는 그 골목길 위에 이제는 주민 모두를 위한 변화를 새겨가고 있다. 2020년, 초선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주말 민원 행사 ‘국쫌만(국회의원 좀 만납시다)’이 그 시작이었다.

상인, 주민들과 수없이 상의했다. 구청 등 관계기관과의 협의도 계속했다. 인근 지역 전통시장 답사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전통시장의 현대화’라는 거창한 이름이 종종 붙곤 하지만, 목표는 단 하나였다. 그저 우리네 삶과 추억이 새겨지고 있는 못골시장에 ‘우아한(우리 아이들을 위한)’ 변화를 쌓아나가는 일이었다.

국비 20억원을 확보해 보행환경부터 가다듬었다. 상인과 손님, 차가 양방향으로 엉키던 좁은 길을 일방통행으로 정비했다. 가게마다 사정이 달랐지만, 만나고 또 만나 얘기를 나누고 설득했다. 한쪽을 양보했지만, 모두의 길이 넓어졌다. 울퉁불퉁하고 쉽게 깨지던 보도블록을 황토 콘크리트로 모두 교체했다. 보행기를 미는 어르신, 유아차를 끄는 가족의 불편함이 사라지고 길의 수명도 길어졌다.

보행로를 차로보다 5cm 높이자는 의견도 있었다. 책상 위에서는 보행로가 높아야 안전하게 생각될 수 있다. 현장은 달랐다. 행인들에게, 특히 손수레를 끄는 상인과 어르신에겐 5cm가 큰 불편 및 위험이 될 수 있다.

고민 끝에 도로와 인도의 높이를 맞췄다. 대신 눈에 띄는 경계선으로 구분해 사고를 예방하고, 인근 남부교육지원청의 협조를 얻어 주차장 개방을 이끌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길의 폭은 그대로지만, 우리 모두의 자리는 훨씬 넉넉하다.

못골시장을 다시 거닐며 상인과 주민의 표정을 살폈다. 확연하게 달라진 시장의 모습에 거리와 행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다시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길을 조성하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양보하고 서로 도운 덕분이다.

국민의 주름살을 펴 드리는 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오랜 발걸음이 깃든 길을 살피고, 막힌 곳을 열고, 여유를 만들고, 작은 턱 하나를 낮추는 일상의 작은 변화가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꾼다.

시장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추억이 쌓인 오래된 길 위에 오늘의 삶이 포개지고, 우리가 조금씩 바꿔놓은 길 위로 또 다른 세대의 시간이 걸어올 것이다. 그 자리를 보듬고 가꾸는 일,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