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플랫폼 기업의 공급망은 전력·노동·입점 판매자까지 확장되며, 기존 제조업과 다른 ‘생태계형 공급망’으로 변화하고 있다. 플랫폼 기업에는 연결된 이해관계자와 리스크를 ESG 관점에서 관리하는 새로운 공급망 경영체계가 요구된다.
[한경ESG] 포스트 ESG 시대의 공급망 전략 ④
네이버는 지난 9월 거린에너지가 전남 진도에서 개발 중인 216메가와트(㎿) 규모 태양광 발전사업에 지분을 투자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을 장기간 구매하는 전력구매계약(PPA)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앞서 4월에는 경북 영양의 풍력발전소 지분 30%를 인수하며 발전사업에 직접 투자한 국내 첫 RE100 기업이 됐다. 두 계약의 목적은 하나다. 24시간 멈추지 않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각 세종’과 ‘각 춘천’에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포털과 클라우드를 파는 기업이 왜 발전사업에 지분을 넣을까. 플랫폼 기업도 이제 공급망을 관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공급망은 자동차·전자 산업의 부품 협력사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발전사업자와 전력망이 있고, 화면 너머에는 배달 라이더와 입점 판매자가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공급망이 원료가 부품이 되고 다시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선형(linear) 구조라면, 플랫폼 기업의 공급망은 플랫폼을 중심으로 발전사업자·노무제공자·입점 판매자가 사방으로 연결되는 방사형 구조에 가깝다. 플랫폼 기업의 공급망은 더 이상 서버와 통신망에 머물지 않는다. 에너지와 노동, 상품까지 하나의 생태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① 전력이 새로운 ‘부품’이 됐다
AI 연산량이 늘면서 데이터센터의 전력밀도는 랙(rack)당 5~15킬로와트(㎾) 수준에서 50~130㎾로 급증했다. 국내에서 2029년까지 신규 건설을 신청한 데이터센터의 전력 용량은 4만9397메가와트(㎿)에 달해, 1기가와트(GW)급 발전소 53기를 새로 지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흐름 속에서 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정보기술(IT) 기업들은 한국전력을 거치지 않고 재생에너지를 직접 조달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RE100 목표뿐 아니라,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는 상황에서 데이터센터 운영비를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크다.
이는 제조업에서 협력사가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공급하는 것처럼, 플랫폼 산업에서는 발전사업자와 전력망이 핵심 공급망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전력과 냉각수가 더 이상 단순한 시설비용이 아니라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해 기업이 직접 관리해야 하는 공급망 리스크로 성격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② 화면 너머 ‘노동자’도 공급망이다
플랫폼 산업의 공급망에서 다루기 어려운 대상은 사람이다. 배달 라이더나 ‘쿠팡플렉스’ 같은 개인사업자 형태의 노무제공자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어서 계약서에 안전 조항을 넣고 정기점검을 하는 전통적 실사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법적으로 협력사도, 전통적인 의미의 근로자도 아닌 노무제공자를 기업의 리스크 관리 범위에 어디까지 포함할 것인지는 플랫폼 기업이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다. 배달의민족 자회사 우아한청년들이 배달플랫폼 노조와 함께 위험성 평가 체계를 도입한 것도 이런 시도의 하나다.
③ 입점 판매자도 공급망이다
이커머스 플랫폼에서는 판매자가 협력사 역할을 한다. 제조기업이 협력사를 평가하고 관리하듯, 플랫폼 기업들도 입점 판매자를 공급망 관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애플이 한 해 895건의 공급망 평가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관리의 논리가 플랫폼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3월 쿠팡 로켓직구로 산 스니커즈를 두고, 쿠팡은 ‘정품’이라 했지만 네이버 크림과 무신사 솔드아웃은 가품 판정을 내려 소비자가 곤욕을 치렀다. 식품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 최근 5년간 온라인·배달앱에서 적발된 원산지 표시 위반은 약 4000건에 달하며, 절반 이상이 배달의민족이었다. 두 사례 모두 개별 판매자의 문제가 플랫폼 전체의 신뢰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플랫폼들은 ‘자리만 빌려준 단순 중개자’라는 항변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판매자와 상품을 검증하는 체계를 갖추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오픈마켓의 ‘단순 중개자’ 면책 약관을 시정하도록 한 것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제조업의 협력사 관리가 생산 단계의 신뢰성을 보는 일이라면, 플랫폼의 판매자 관리는 상품이 소비자에게 닿기 직전의 마지막 접점을 스스로 검증하는 일이다. 이 마지막 접점을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플랫폼이 새로 갖춰야 할 공급망 리스크 관리 체계의 핵심이 되고 있다.
공급망은 생태계…ESG 책임의 경계 넓어져
전력망과 발전사업자, 배달 라이더와 입점 판매자. 겉모습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 하나의 질문 앞에 있다. 위험이 생겼을 때 스스로 발견하고 개선할 수 있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는가. 기업의 거버넌스와 위험관리, 컴플라이언스를 통합하는 GRC와 계획-실행-점검-개선으로 이어지는 PDCA 같은 경영체계는 이제 제조업 협력사 관리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플랫폼을 둘러싼 생태계 전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플랫폼 공급망을 구조적으로 보면 크게 에너지·노동·재화라는 세 갈래가 플랫폼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최근에는 AI 도입에 따른 정보관리·데이터 프라이버시까지 겹쳐 관리 범위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갈래 모두에서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전력은 발전사와 한국전력이, 노동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가, 상품은 생산자와 판매자가 책임져 왔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그 책임의 무게중심이 플랫폼 쪽으로 옮아오고 있다.
결국 변하고 있는 것은 ‘공급망’이라는 말 자체의 정의다. 그 경계를 어디에 긋느냐를 플랫폼 기업이 사실상 스스로 정하고 있고, 그 결정이 시장 전체가 따라갈 공급망 관리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제조업의 ESG 경영이 계약 체결 후 사후 점검에 무게를 둔 체계였다면 플랫폼 산업에서는 ESG가 계약과 거래구조를 설계하는 단계에서부터 작동해야 하는 경영 원칙이 되고 있다. 관건은 법적 책임의 소재를 가리는 일이 아니라, 플랫폼이 이 새로운 공급망을 어떤 관리 체계와 경영기법으로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에 있다.
다만 플랫폼·물류·서비스 산업의 공급망은 흐르는 것이 부품이 아니라 에너지·노동·재화라는 점, 상대가 법적 지위가 모호한 이해관계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제조업과 다르다. 산업마다 공급망을 다시 정의하고 그에 맞는 리스크 관리 체계를 새로 설계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공급망은 더 이상 제조업만의 개념이 아니다. 기업을 둘러싼 생태계 전체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플랫폼 기업이 발전사업에 지분을 넣고, 배달 플랫폼이 노무제공자 위험성 평가 체계를 도입하며, 이커머스 플랫폼이 자체 검증 체계를 갖추는 것은 이 생태계형 공급망을 관리하는 새로운 경영기법이 자리 잡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