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집값과 자산시장은 여느 때보다 예측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앞선 세대가 걸어온 삶의 공식도 희미해졌습니다.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이 기사를 읽는 우리는 그 어느 세대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연금은 더 이상 은퇴를 앞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금 빌드업>은 가장 긴 투자, 연금을 처음부터 배우고 차근차근 쌓아가기 위한 기록입니다. [편집자주]

퇴직연금도 인공지능(AI)에 맡기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금융회사들이 투자자의 성향을 분석해 상품을 고르고 사고파는 것까지 대신하는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잇달아 내놓으면서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인공지능(AI)과 컴퓨터 알고리즘이 투자자의 성향을 분석해 자산을 자동으로 관리하고 투자해 주는 디지털 자산관리 서비스다. 직접 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가입자도 AI에 맡기면 손쉽게 연금을 굴릴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최근 석 달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3일 코스콤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센터 공시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알고리즘 456개 가운데 94%가 손실을 냈다. 플러스 수익률을 기록한 알고리즘도 모두 2%를 밑돌았다. 반면 기간을 2년으로 늘리면 수익률이 100%를 넘어선 알고리즘도 있었다.

금융회사들 AI 연금 경쟁…"알아서 굴려드립니다"

금융회사들은 AI를 활용한 퇴직연금 서비스를 잇달아 확대하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한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일임서비스가 지난해 3월부터 순차적으로 시작되면서 AI가 개인형퇴직연금(IRP) 적립금의 투자 판단부터 매매까지 맡을 수 있게 됐다.

최근에도 관련 서비스 출시가 이어졌다. 미래에셋증권은 지난달 IRP 계좌에서 이용할 수 있는 '퇴직연금 로보랩'을 선보였다. 알고리즘이 투자 성향에 맞춰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시장 상황에 따라 자산 비중을 조절한다. 신한투자증권도 지난달 말 '신한 SOL 로보연금'을 출시했다. AI가 상장지수펀드(ETF)의 자산배분과 종목 선정, 리밸런싱(자산 재조정)을 수행하는 서비스다.

이들이 AI 연금에 뛰어드는 데는 빠르게 커지는 퇴직연금 시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도 있다. 가입자와 운용 자산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모든 고객의 포트폴리오를 사람이 일일이 점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람의 감정이나 판단의 편향을 줄이고 일관된 투자 전략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라며 "AI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 단순 알고리즘 매매를 넘어 자산관리 전반으로 활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퇴직연금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반면 이를 관리할 전문인력은 부족한 상황"이라며 "AI를 활용하면 자산배분이나 리밸런싱 같은 업무를 효율화하고 더 많은 가입자를 관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456개 중 430개 손실…AI도 변동성 장세 못 피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그러나 AI가 굴린 연금의 최근 성적표는 좋지 않았다. 코스콤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센터에서 국내 자산 기반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알고리즘 456개의 최근 3개월 수익률(지난 11일 기준)을 살펴본 결과, 430개(94.3%)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플러스 수익률을 낸 알고리즘은 26개로 전체의 5.7%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최고 수익률이 1.59%로 모두 2%를 밑돌았다.

최근 증시가 크게 출렁이면서 AI도 시장 충격을 피하기 어려웠다는 진단이 나온다. 코스피는 지난 6월11일 7763.95에서 이날 6910.90으로 최근 3개월간 10.99% 하락했다. 변동 폭은 이보다 훨씬 컸다. 장중 기준 6월 19일 9385.59까지 오른 코스피는 7월 29일 5262.77까지 밀리며 고점 대비 43.93% 급락했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사람처럼 주가 급락에 공포를 느끼거나 급등장에서 추격 매수하지 않고 미리 정한 원칙에 따라 투자한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고 손실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알고리즘 역시 주식과 채권 등에 투자하는 만큼 시장 전체가 급격하게 흔들리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3개월은 부진했지만 2년 수익률은 130% 넘기도

기간을 길게 잡으면 성적표는 달라진다. 퇴직연금 로보어드바이저 가운데 2년 수익률이 가장 높은 알고리즘은 134.17%를 기록했다. 113.09%, 106.50%로 100%를 웃돈 알고리즘도 있었다. 최근 3개월 성적과는 대조적이다.

퇴직연금은 몇 달 뒤 사용할 돈이 아니라 수년에서 수십 년에 걸쳐 노후자금을 쌓는 장기 투자다. 로보어드바이저 역시 단기 시장 방향을 맞히기보다 여러 자산에 돈을 나눠 담고 시장 변화에 맞춰 비중을 꾸준히 조절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만 장기 수익률이 높다고 앞으로의 성과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코스콤 테스트베드에 공개된 수익률도 실제 금융회사 가입자의 계좌 수익률과는 차이가 날 수 있다. 가입 시점과 매매 가격, 수수료 등이 투자자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한상용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알고리즘을 활용한 투자 판단은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시장 불확실성이 급격히 커지면 모든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며 "퇴직연금은 장기 투자 상품인 만큼 단기 수익률만으로 판단하기보다 장기간의 운용 성과와 위험관리 능력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AI 기반 자산관리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소비자가 자신의 돈이 어떤 원리와 기준으로 운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며 "사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정보 비대칭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운용 방식과 위험 요인, 손실 발생 시 책임 범위를 충분히 고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연지 한경닷컴 기자 kong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