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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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래’란 애칭으로 불리는 나이키 덩크 로우 레트로 블랙(사진)은 2020년대 초 ‘리셀(재판매) 붐’을 상징하는 제품이다. 한정판 중고 거래 플랫폼 크림에 따르면 13만9000원에 발매된 이 농구화는 2021년 1월 출시 직후 50만원에 가까운 가격에 되팔렸다. 단일 모델 기준 누적 35만 건이 거래되며 리셀 시장에서 흔치 않은 기록을 썼다. 패션업계에서 ‘한정판 나이키 운동화’가 갖는 위상은 그만큼 컸다. 그러나 11일 현재 이 제품 리셀가는 발매가보다도 낮은 8만9000원에 불과하다.

추락한 나이키의 위상은 주가에도 반영됐다. 이달 21일자로 S&P100지수에서도 퇴출된다. 2021년 말 2497억달러(약 336조원)가량이던 나이키 시가총액은 현재 5분의 1 수준인 543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올해 들어서만 36%가량 증발했다.
"그 돈 주고 누가 신어요"…'50만원→9만원' 나이키의 굴욕
글로벌 1위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는 왜 추락했을까. 2020년 취임한 존 도나호 최고경영자(CEO)의 오판이 나이키 추락의 시작이었다. e커머스업체 이베이와 컨설팅기업 베인앤드컴퍼니를 거친 그가 수치와 트래픽 중심의 전략을 적용하면서 스포츠 가치 기반의 나이키 브랜드와 핵심 경쟁력이 크게 훼손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표적인 실책이 탈(脫)아마존을 선언하며 실행한 ‘D2C’(Direct-to-Consumer·소비자 직접판매) 전략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오프라인 매출이 급감하자 나이키는 풋라커 등 주요 오프라인 파트너와의 거래를 축소·중단하고 자사몰과 직영 매장 위주로 유통망을 재편했다. 플랫폼 입점 수수료를 최소화하고 고객 데이터를 확보해 브랜드 충성도를 높인다는 구상이었다. 초반에는 이 전략이 먹히는 듯했다. 하지만 나이키가 떠난 온·오프라인 매대는 역설적으로 경쟁 브랜드를 키웠다. 호카, 온 등 러닝 특화 브랜드와 룰루레몬, 알로 등 애슬레저 의류업체가 나이키의 시장 점유율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신생 브랜드가 ‘러닝 붐’에 올라타 치열하게 경쟁하는 동안 나이키는 ‘조던 시리즈’ 등 과거 농구화의 명성에 젖어 있었다. 나이키의 강점이던 ‘스포츠 오펜스(Sport Offense)’ DNA도 파괴됐다. 스포츠 오펜스란 러닝 농구 등 특정 스포츠의 선수, 동호인과 긴밀히 소통해 제품 개발부터 마케팅, 판매까지 공격적으로 실행하는 마케팅 전략을 의미한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도나호 CEO는 스포츠맨십과 스니커즈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통업체식 경영을 펼쳤다”며 “그 결과 브랜드 희소성이 상실됐고 넘쳐나는 재고 처리 때문에 대규모 할인 행사를 열어 브랜드 가치가 추가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분석했다.

중국 시장도 나이키의 발목을 잡았다. 나이키 전체 매출에서 15%를 차지하는 중화권은 북미·유럽, 중동·아프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시장이다. 한때 중국에서 ‘운동화의 왕’으로 불린 나이키는 안타스포츠, 리닝 등 토종 브랜드에 밀려 시장을 빼앗겼다.

2024년 나이키는 실적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엘리엇 힐 CEO를 구원투수로 내세웠다. 인턴부터 마케팅 담당 임원까지 32년간 나이키에 몸담은 ‘나이키맨’이다. 힐은 D2C 전략을 뒤집고 풋라커, JD스포츠 등 대형 유통 채널과의 관계 회복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정상화 노력이 수년에 걸쳐 훼손된 브랜드 가치를 되살리고, 빼앗긴 시장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 시장의 평가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