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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1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플라스틱 문제를 뿌리 뽑는 연대(플뿌리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플라스틱 오염 시민 인식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플라스틱 졸업식'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그린피스
국내외 1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플라스틱 문제를 뿌리 뽑는 연대(플뿌리연대)' 관계자들이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플라스틱 오염 시민 인식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플라스틱 졸업식'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그린피스
지난 8월 12일 유럽연합(EU)의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이 27개 회원국 전역에서 시행됐다. 2025년 2월 발효된 PPWR은 회원국별로 국내법 전환 없이 바로 적용되는 강력한 규정이다. 이에 따라 회원국은 2018년 대비 1인당 포장폐기물 발생량을 2030년 5%, 2035년 10%, 2040년 15%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해야 한다. 식품 접촉 포장재의 유해물질 규제와 적합성 선언서 및 기술문서 요건 적용을 시작으로, 2030년부터는 과대포장과 일부 일회용 포장이 제한되고 팔레트·상자 등 운송 포장 40% 재사용 의무가 부과된다. 재활용 가능 설계 의무를 위반하거나 등급에 미달한 포장재 역시 시장에서 퇴출된다.

핵심은 ‘퇴출’이다. 규정을 맞추지 못할 경우 과징금이나 부담금 처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판매 자체가 막힌다. 포장은 식품·화장품·생활용품·전자제품 등 사실상 모든 소비재에 필요하다. 대(對)EU 수출기업에게 PPWR은 산업 전반에 걸친 강력한 비관세 장벽으로 작동한다. 특히 설계 요건과 기술문서 작성 부담은 하청·협력업체까지 확대되므로, 직접 수출하지 않는 국내 포장재·부품 기업도 공급망을 통해 동일한 규제 압박을 받는다.

식품·화장품업계 발등의 불

실제 일부 업계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식품업계가 대표적이다. 농심과 삼양식품 등 라면봉지는 여러 소재를 겹친 복합재질이어서 재활용성 평가에서 불리하고, 2030년 이후 설계·재생원료 요건이 적용되면 시장 진입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농심은 2030년까지 수출 비중을 60% 이상 높인다는 목표를 두고 유럽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상황이다. CJ제일제당과 풀무원 등 주요 식품기업은 규제 시행 전부터 EU 거래선에게서 적합성 선언서 제출을 요청받았다.

화장품 업계도 사정이 비슷하다. 프리미엄 패키징에 흔히 쓰이는 메탈릭 코팅과 에어리스 펌프 용기가 재활용성 등급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기업들은 포장 설계를 재검토하고 재생원료 확보에 나서는 등 비용을 치르는 중이다.

이런 흐름은 유럽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순환경제법(SB54)도 지난 5월 1일 본격 이행 단계에 들어섰다. 캘리포니아는 2032년까지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를 100% 재활용 또는 퇴비화 가능하게 만들고,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량을 25% 감축하며, 65%를 실제 재활용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제품을 파는 기업은 지난 6월 1일까지 생산자책임기구(PRO) 등록과 포장재 데이터 제출을 마쳐야 했고, 이를 어기면 제재 대상이 된다.

오리건·콜로라도 등 다른 주도 포장재 생산자책임(EPR) 제도를 잇달아 도입하고 있다. K-푸드·K-뷰티의 양대 수출 시장인 EU와 미국이 나란히 기준연도 대비 절대량 감축과 생산자 책임을 법제화하고 있다.
지난 2022년 그린피스가 우루과이에서 플라스틱 감축을 요구하는 프로젝션 액션을 진행했다. 사진=그린피스
지난 2022년 그린피스가 우루과이에서 플라스틱 감축을 요구하는 프로젝션 액션을 진행했다. 사진=그린피스
국내 정책 규제 공백 시급

국내 정책은 이 같은 글로벌 규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규제 대신 자율 협약만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 7월 13일,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커피·패스트푸드 업계 23곳 및 개인 매장 150여 곳과 ‘탈플라스틱 실천문화 확산 협약’을 맺었다. 이 같은 협약은 언론 보도로 확인된 것만 해도 2013년 이후 다섯 번째다. 하지만 자율성에 기대는 협약은 방향을 제시하거나 전환을 이끌기 어려워 보인다. 오히려 기업이 투자 판단을 내릴 명확한 근거를 주지 못해 막대한 불확실성 비용을 치르게 한다. 규제가 언제 어느 수준으로 도입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설비와 공정을 바꾸는 기업은 없다.

자율 협약의 성과가 좋은 것도 아니다. 협약 참여 업체의 일회용컵 사용량은 2016년 약 7억6000만 개에서 2024년 10억7000만 개로 41% 늘었다. 2022년 법으로 금지한 종이컵·플라스틱 빨대 규제도 철회되거나 계도기간이 무기한 연장되며 3년째 멈춰 있다. 대표적 재사용 시스템인 빈용기 보증금제도 자율 시행으로 22년간 출고량이 33% 감소했고, 다회용기 사업 역시 강제 의무 없이 단기 보조사업에만 의존하다 보니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 22일 발표된 제5차 국가환경종합계획 수정계획안(2026~2040) 역시 글로벌 흐름을 역행한다. PPWR은 단순 재활용을 넘어 재사용 물류와 리필 인프라 구축까지 요구한다. 하지만 국내 수정계획안의 주요 정책과제는 재활용 기술·인프라·재생원료 의무 사용 등에 과도하게 쏠려 있다. 우리 기업들은 국내 실증 레퍼런스조차 없이 유럽 기준에 맞춰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국내용과 수출용을 따로 만드는 생산 이중화 비용은 온전히 기업의 몫이 되고, 국내 시장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으니 초기 투자비를 내수로 분산할 길도 막힌다.

나아가 해당 안은 폐플라스틱 감량 지표로 ‘배출전망치(BAU) 대비 감축’을 제시했다. BAU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때의 전망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감축률 수치는 높아 보일지 몰라도 실제 폐기물 총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착시를 일으킨다. 강력한 규제로 플라스틱 사용량과 폐기물 발생량을 줄이는 국제 흐름과 정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국무회의 확정 전까지

다행히 이번 수정계획안은 올 연말 국무회의 확정 전까지 바로잡을 기회가 남아 있다. 다음의 세 가지 전환이 시급하다. 첫째, 폐플라스틱 감량 목표를 BAU가 아닌 기준연도 대비 절대량 감축으로 되돌려야 한다. 상위법(순환경제사회전환촉진법)조차 법정 지표를 ‘기준연도 대비’로 정의하고 있는 만큼, 하위 계획이 이를 뒤집을 논리적 근거는 없다.

둘째, 재활용에 편중된 정책 지표를 원천 감량과 재사용 우선으로 재조정해야 한다. 발생 자체를 줄이고 재사용을 강조하는 PPWR의 추세를 볼 때, 사후 재활용에만 치중한 정책 방식으로는 글로벌 규정을 맞추기 어렵다. 셋째, 실효성 없는 자율 협약을 걷어내고 구속력 있는 규제와 의무로 대체해 기업이 투자 시점을 계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규제는 투자의 확실한 근거다. 지금 한국 기업이 겪는 위험은 규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떤 규제가 올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있다. 유럽과 미국은 이미 기준을 확정했다. 느슨한 국내 정책이 수출 리스크로 이어지기 전에, 서둘러 규제 공백을 메우고 국가 정책의 눈금을 다시 바르게 세워야 한다.

한정희 그린피스 캠페인 전문위원
포장폐기물 감축 나선 EU...한국은 준비됐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