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가 낮아지자, 짙푸른 바다 위로 섬의 윤곽이 시야에 들어온다. 세계 지도에서 고작 '점'으로 보히는 나라, 몰타다. 지중해의 한적하고 느긋한 섬나라를 상상하며 마주한 세인트 줄리앙 지역은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고층 호텔과 콘도미니엄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해안가의 화려함과 번잡함이 놀랍다. 관광객만 많은게 아니다. 영어가 공용어라 어학연수와 한 달 살기를 하러 오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석회암을 벌집처럼 깎은 국회의사당 외관 / 사진. ©박은새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석회암을 벌집처럼 깎은 국회의사당 외관 / 사진. ©박은새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요새 도시다. 오스만 제국의 대공세를 막아낸 성 요한 기사단이 1566년부터 도시 전체를 요새로 쌓아 올렸다. 아파트 20층 높이의 성벽이 바다 위로 솟아 있다. 발레타로 들어서는 입구에 독특한 건물이 보인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몰타 국회의사당이다. 도시 전체를 이루는 노란 석회암을 그대로 가져와 기계로 깎아 지었다. 벌집을 형상화한 외벽은 2015년 완공 당시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시대를 선도하는 행보는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감당해야 하는 고충이 느껴진다.

발레타는 계획도시답게 도로가 바둑판식이라 길 찾기가 쉽다. 언덕 도시인데도 갑옷 입은 기사와 대포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지어져서 계단이 낮다. 골목마다 건물 외벽에 발코니가 튀어나와 있다. 갈라리야라고 부르는 몰타식 폐쇄형 발코니로, 아랍의 격자창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원색부터 파스텔까지 집집마다 다른 색을 칠해 두었다. 규칙도 패턴도 없다. 일상의 주거 공간이 한 편의 세트장 같다.
바다로 이어지는 발레타의 돌계단 골목, 집집마다 다른 색의 갈라리야가 걸려 있다. / 사진. ©박은새
바다로 이어지는 발레타의 돌계단 골목, 집집마다 다른 색의 갈라리야가 걸려 있다. / 사진. ©박은새
몰타는 자원이라 부를 것이 없는 바위섬이지만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하여 끊임없이 침략에 시달렸다. 페니키아,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스페인, 프랑스, 영국이 거쳐 갔고, 1960년대에 이르러 독립했다. 기사단조차 스페인 왕에게 매년 매 한 마리를 바치는 조건으로 이 섬을 받았다. 발레타 끝단, 바다 건너편으로 오스만의 함대를 버텨낸 또 다른 요새 도시들인 쓰리 시티즈가 보인다. 요새로 둘러싸인 이 섬나라가 가진 사연이 본격적으로 궁금해진다.
발레타 끝단에서 바라보는 쓰리 시티즈, 오스만을 버텨낸 요새의 모습. / 사진. ©박은새
발레타 끝단에서 바라보는 쓰리 시티즈, 오스만을 버텨낸 요새의 모습. / 사진. ©박은새
본섬 북쪽 끝으로 차로 한 시간을 달려 페리로 올라탄다. 25분이면 고조 섬이다. 손으로 뜨는 레이스, 염소젖 치즈, 2천 년이 넘은 천일염전, 그리고 원시적 아름다움이 보존된 자연이 있다. 볼거리가 많지만 바다만 봐도 시간이 부족하다. 자연이라고 믿기 어려운, 화학적으로 만들어 낸 파란 인공색소를 부어 버린 듯한 바다를 마주하니, 오디세우스의 10년 귀향 여정의 무대였던 지중해에 비로소 도착한 것 같다.
고조 섬의 석회암 절벽 아래로, 잉크를 부은 듯 짙푸르게 펼쳐지는 지중해. / 사진. ©박은새
고조 섬의 석회암 절벽 아래로, 잉크를 부은 듯 짙푸르게 펼쳐지는 지중해. / 사진. ©박은새
구명조끼를 입고 작은 보트에 오른다. 보트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짙은 코발트빛 물길을 가로지른다. 석회암 절벽 위 어딘가에 여신 칼립소가 오디세우스를 7년 동안 붙잡아 두었다는 동굴이 있나 싶다. 속도를 늦춘 보트를 타고 망망대해 같은 지중해 한가운데 떠 있으니, “이번 고난이 추가될 테면 되라지요”라고 말하는 오디세우스의 태도가 생각난다. 귀향을 열망하는 오디세우스는 안락에 머무는 대신 목숨을 걸고 모험한다.
절벽 아래 색색의 보트하우스, 여기서 작은 배를 타고 칼립소의 바다로 나선다. / 사진. ©박은새
절벽 아래 색색의 보트하우스, 여기서 작은 배를 타고 칼립소의 바다로 나선다. / 사진. ©박은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뱃길로 한 달이면 닿을 거리가 10년이 걸렸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한 대가로, 거인의 아버지 포세이돈이 오디세우스를 괴롭힌 탓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여신 칼립소는 자신의 곁에 머물면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오디세우스는 불멸의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제안을 거절하고 필멸의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한다.

귀향이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이를 확신할 수 없었던 오디세우스. 그는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줏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킨다 해도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이 있기에 나는 참을 것”이라 말한다. 주어진 몫을 감당하고, 심지어 운명이 무엇이든 그마저 거스르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생명력은 신들을 감동시킨다. 위기와 역경을 피할 분별력과 도움의 손길을 받는다.

뗏목을 엮어 다시 바다로 나간 오디세우스는 난파와 표류 끝에 거지꼴로 고향 이타카에 닿는다. 20년을 기다린 아내 페넬로페와의 재회, 장성한 아들과의 첫 대면. 감격을 만끽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아직 우리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오. 앞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고가 닥칠 것이고 아무리 버겁고 힘들더라도 나는 그것을 모두 완수해야 하오”라며 안주하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를 통하여 인간다움은 숱한 고통과 기쁨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행복의 조건을 찾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간답기를 택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3천 년째 떠 있는 바다 위, 인구 약 55만의 작은 섬나라가 전 세계를 향해 과감하게 뻗어 나가는 모습은 놀랍다. 2000년대 초 EU에서 가장 먼저 온라인 게임 산업에 문을 열었다. 카지노, 스포츠 베팅, 포커, 복권까지 아우르는 산업이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낮은 실효세율을 보장하는 법인세 환급 제도는 외국 자본과 지주회사, 게임사로 하여금 몰타를 선택하게 한다. 오스만의 함대를 막으려 섬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쌌던 나라가, 지금은 전 세계를 향해 빗장을 풀고 자본과 사람을 끌어들인다.

개방에는 빛과 그늘이 함께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몰타는 개방형 경제로 벌어들인 재정을 복지로 되돌리는 구조를 만들었다. 공공병원 진료비가 무료이고, 거주자는 시내버스 요금을 내지 않는다. 무상 고등교육이 보장되며, 몰타 대학의 시민권자 학생들은 등록금 면제에 더해 생활보조금을 받는다. 국가가 지정한 우선 분야를 전공하면 4주마다 445유로, 우리 돈으로 70만 원가량의 '용돈'이 통장에 들어온다.

어마어마해 보이는 복지에 의구심과 함께 귀가 솔깃해진다. 여러 궁금증은 어촌 마을 마샤슬록에 도착하자 금세 잠잠해진다. 레스토랑 타르타룬(Tartarun)은 그날 아침 항구에 올라온 생선과 해산물로 메뉴를 정한다. 분홍새우 카르파초 같은 호사스러운 요리 사이에 김치가 사이드 메뉴로 있다. 유럽산 캐비지로 순하게 담았으려나 싶어 주문했는데, 제대로다. 빳빳하게 다려진 새하얀 식탁보 위에 김치 국물 자국을 남기고 레스토랑을 나오니, 천 년 넘게 배가 정박해 온 항구의 전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천 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전통 어촌 마을 마샤슬록, 전통 배 루주가 물 위에 떠 있다. / 사진. ©박은새
천 년의 역사가 살아있는 전통 어촌 마을 마샤슬록, 전통 배 루주가 물 위에 떠 있다. / 사진. ©박은새
매일의 잔치와 향연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는 “바닷가에 앉아 눈물과 신음과 슬픔으로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며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눈물에 젖어 바라보았다.” 귀향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진 전쟁 영웅이지만, 자신의 처지와 신들의 훼방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연약한 모습이다. 각자의 사연은 눈앞의 바다를 각자의 바다로 만든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놀란 감독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관객과 직접 만난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오디세우스를, 지중해를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까.
*넥타르(nectar): 불사신들이 마시는 신주(神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