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사람이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향기로운 차 한 잔의 문화를 향유해오고 있다. 17세기부터 유럽에 청나라의 차가 수입되기 시작했는데, 서양 사람들도 빵만으로는 살 수 없지 않았을까. 19세기 들어 영국에서는 '애프터눈 티'라는 사교적인 문화가 꽃피울 정도로 영국인들에게 차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영국은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양의 차를 수입하면서 은으로 값을 치렀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수입만 하다 보니 무역 불균형이 쌓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청나라에 수출하는 삼각무역을 일으키게 된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외관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홍콩 페닌슐라 호텔 외관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차와 아편 모두 인간이 탐닉하는 기호품이다. 동서양의 탐닉이 충돌한 결과로 인류사에 있어서 큰 사건 중 하나인 아편전쟁이 일어났고,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게 된다. 2차 아편전쟁 후 홍콩섬을 바라보는 구룡반도까지 영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1928년 이곳의 중심부에 페닌슐라 호텔이 들어서게 된다. 대륙을 연결하는 증기선과 철도망의 발달 덕분에 여행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절이다. 이때 전 세계 곳곳에는 그랜드 호텔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애프터눈 티 문화가 호텔에서 즐기는 사교 이벤트로 브랜딩을 확장하게 된 것도 이즈음 20세기 초의 일이다.

아시아 그랜드 투어를 끝으로 <정글북>을 쓴 영국의 작가, ‘러디야드 키플링’은 "수에즈 동쪽 너머의 신비로운 동양 세계"라는 말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동양에서 으뜸으로 평가되는 호텔에는 "수에즈 동쪽"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페닌슐라 호텔은 "수에즈 동쪽 최고의 호텔"로 통하는 월드 클래스였다. 호텔 오픈 때부터 서빙된 애프터눈 티는 댄스 연회와 함께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홍콩 상류층들과 전 세계의 엘리트들이 교류하는 홍콩 사교의 장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는 오늘날까지 호텔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그랜드 로비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홍콩 페닌슐라 호텔 그랜드 로비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홍콩 페닌슐라 호텔 그랜드 로비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홍콩 페닌슐라 호텔 그랜드 로비 / 사진. ©The Peninsula Hong Kong
신고전주의 양식의 호텔 외관은 뉴욕 5번가에 늘어선 화려한 건물들이 가진 매력을 머금고 있다. 그랜드 로비는 에드워디언 바로크 양식으로 장식되었는데,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빅토리안 양식에 비해서 절제된 우아함이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높은 층고의 천정을 떠받치며 가지런히 정렬된 기둥들, 천정의 크라운 몰딩과 조화를 이루는 도금 장식의 화려함에 눈길이 간다. 기둥의 각 코너에는 76개 각기 다른 표정의 가고일 장식이 조각되어 있다. 다양한 표정의 디테일을 발견하는 순간,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극장에 들어온 느낌이 들 것이다. 감미로운 라이브 음악까지 흐르는 이 그랜드 로비에서, 홍콩에서 가장 상징적이고 우아한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 경험이 펼쳐진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류재도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류재도
애프터눈 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단연 3단 트레이다. 원래는 영국 귀족들을 중심으로 사적인 장소에서 코스 형식으로 서빙되었지만, 20세기 초부터 호텔 로비에서 즐기는 이벤트 문화로 진화하면서 3단 트레이 형식이 자리를 잡았다. 3단 트레이가 시각적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인 만큼, 호텔마다 각자의 개성을 살린 디자인에 신경을 쓴다. 페닌슐라 3단 트레이 접시와 티컵에는 은은한 금빛 띠와 네이비 포인트가 테두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랜드 로비의 분위기를 담아낸 이 디자인은 '티파니앤코'에서 주문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포크와 나이프, 티스푼은 영국산 실버웨어를 쓴다. 3단 트레이 스탠드, 티팟, 밀크팟, 티 거름망 모두 은빛으로 영롱하다. 영국과 청나라를 오가던 은이 동서양 역사의 용광로를 거쳐서 실버웨어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홍차 / 사진. ©류재도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홍차 / 사진. ©류재도
애프터눈 티의 핵심은 역시 홍차다. '페닌슐라 블렌드'는 대표적인 홍차 메뉴로, 고급 홍차로 유명한 인도 다즐링 지역의 다원에서 손수 재배한 차를 블렌딩한 것이다. 다즐링 홍차 특유의 싱그러운 과일과 꽃 향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름에 수확된 것만 페닌슐라 제품으로 엄선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코끝에서부터 아로마가 살랑거리고, 쓴맛 없이 부드러운 목 넘김이 매혹적이다. 청나라가 독점했던 차가 인도에서도 재배되고, 차를 100% 수입했던 영국이 막강한 차 수출국으로 거듭났다는 역사적 사실이 블렌딩되면서 더욱 묘한 향미가 느껴지는듯하다.

오후의 여유와 함께 간단하게 간식을 즐기는 애프터눈 티는 미각을 부드럽게 열어주는 세이보리, 핑거 샌드위치부터 시작한다. 얇게 썬 오이에 딜 허브와 크림치즈를 곁들인 오이 샌드위치는 영국 정통 애프터눈 티의 대표 메뉴이자 페닌슐라의 전통이기도 하다. 샌드위치 라인업에 따라 훈제 연어 샌드위치 같은 클래식 메뉴가 3단 트레이의 1층에 서빙된다. 2층에는 한입에 감칠맛을 돋아주는 카나페가 올라가는데, 맛깔나는 프레젠테이션 덕분에 눈부터 즐겁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스콘 / 사진. ©류재도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스콘 / 사진. ©류재도
세이보리로 팔레트를 열고난 다음 이어지는 코스는 스콘이다. 초창기 레시피 그대로 구워진다는 페닌슐라 스콘은 전 세계 미식가들 사이에서 홍콩에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는 시그니처로 통할 정도다. ‘데본’ 스타일의 부드러운 클로티드 크림과 하우스 메이드 딸기잼을 발라서 스콘을 먹다보면, 밀도 높은 식감과 함께 기분 좋게 포만감이 느껴진다. 따뜻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천으로 감싸서 별도로 서빙되는 섬세함도 돋보인다.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류재도
홍콩 페닌슐라 호텔 애프터눈 티 세트 / 사진. ©류재도
스콘 다음 코스는 3단 트레이 가장 위를 장식하는 디저트다. 페이스트리와 케이크로 구성되는 디저트는 시즌별로 메뉴 구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다채로운 달콤함을 선사한다. 레시피 전통을 지키고 있는 핑거 샌드위치와 스콘과는 대조적으로, 디저트 메뉴에서는 동양적인 엑센트가 가미되는 맛의 변주를 기대할 수 있다. 기분 좋게 팔레트를 클렌징하기에 감각적인 디저트만 한 것이 없다.

홍콩 지명은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명나라 때는 향나무의 교역항이었고, 청나라 때 영국으로 할양된 이후에는 대영제국의 차 무역항이었다.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오이 샌드위치는 고온다습한 홍콩의 풍토와 어울리지 않는 영국식 식문화다. 하지만 세계의 차 문화가 교차하는 홍콩에서 영국식 차 문화를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에는 상징성이 있었다. 차 재배 종주국의 앞마당에서 애프터눈 티를 격조있는 사교문화로 브랜딩 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페닌슐라 애프터눈 티 전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의 여유를 탐닉하는 문명인들을 유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