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르 드 루비 네크리스’ 5.11캐럿 오벌 컷 루비 1개(모잠비크 산)가 메인 스톤으로 세팅되었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오로르 드 루비 네크리스’ 5.11캐럿 오벌 컷 루비 1개(모잠비크 산)가 메인 스톤으로 세팅되었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7월을 닮은 보석이 있다. 깊고 강렬한 붉은색으로 수천 년 동안 왕들을 매혹해 온 '보석의 왕' 루비다. 실제 루비는 7월의 탄생석이다. 루비의 힘은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발라스 루비(Balas Ruby)', '가난한 자의 루비(Poor Man's Ruby)'처럼 루비의 이름을 따온 보석이 유난히 많다. 하지만 이런 루비 가운데 상당수는 보석학적으로 루비가 아니다.

루비의 이름을 빌린 붉은 보석들

‘플레르 드 로투스 미스테리유즈 클립’ 트래디셔널 미스터리 세팅 루비로 인해 레드 컬러의 강렬함이 배가된 작품이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플레르 드 로투스 미스테리유즈 클립’ 트래디셔널 미스터리 세팅 루비로 인해 레드 컬러의 강렬함이 배가된 작품이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발라스 루비'는 루비가 아니라 정확히는 스피넬이다. 왕실의 보물과 왕관에 세팅된 보석들 가운데 루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지만, 현대 보석학이 밝혀낸 결과 실제로는 스피넬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가난한 자의 루비'는 붉은 가닛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스피넬을 루비라고 부른 것은 혼동의 결과지만, 붉은 가닛은 경우가 다르다. 19세기 유럽에서 널리 유통된 붉은 가닛은 루비보다 구하기 쉬웠고 가격도 상대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자의 루비(Poor Man's Ruby)'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발라스 루비’, ‘가난한 자의 루비’ 말고도 다른 보석들이 단연 많이 빌려 쓴 이름이 바로 루비다. 왜 사람들은 굳이 다른 보석에 루비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가장 아름다운 붉은 보석의 기준이 바로 루비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보석을 하나의 범주로 인식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루비가 있었다. 어떤 보석이든 루비를 닮았다고 불리는 것은 최고의 찬사였다. '가난한 자의 루비'라는 별칭도 가닛이 루비를 대신할 만큼 아름다운 붉은색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마치 오늘날 뛰어난 스포츠 선수를 '제2의 ○○'라고 부르는 것처럼.

루비와 스피넬, 왜 중세부터 근대 초기까지 헷갈렸나

‘루도 브레이슬릿’ 다이아몬드 18개, 루비 69개, 코랄 3개가 세팅되었으며 각 스톤의 컬러와 특징이 조화를 이루며 특별함을 더하는 작품이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루도 브레이슬릿’ 다이아몬드 18개, 루비 69개, 코랄 3개가 세팅되었으며 각 스톤의 컬러와 특징이 조화를 이루며 특별함을 더하는 작품이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가난한 자의 루비’처럼 루비가 아닌데도 루비라고 부른 것과 달리, 스피넬을 ‘발라스 루비’라고 불렀던 것은 혼동의 결과였다. 과거에는 루비와 스피넬을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두 보석이 같은 광산에서 함께 산출됐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루비 산지로 꼽히는 미얀마 모곡(Mogok) 광산에서는 루비와 스피넬이 동시에 발견됐다. 광물의 화학 성분이나 결정 구조를 분석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보석의 색과 투명도, 크기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그래서 선명하고 아름다운 붉은색을 띠면 루비로 여겼다.

이러한 혼동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지다가 18세기 후반부터 광물학과 보석학이 발전하면서 스피넬이 루비와는 다른 광물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루비와 스피넬은 전혀 다른 보석이다. 루비는 자연에서 대형 결정체로 성장하기 어렵다. 투명도가 뛰어나면서 크기까지 큰 루비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3캐럿 이상부터 희귀성이 급격히 높아진다. 10캐럿 이상은 세계적인 희소성을 인정받는다. 반면, 스피넬은 상대적으로 큰 결정체로 자라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미얀마 모곡 지역에서는 수백 캐럿에 이르는 대형 스피넬도 산출됐다. 이런 붉은색의 대형 스피넬은 웅장한 왕실 보물을 제작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왕실에 헌상된 일부 스피넬은 왕관, 왕홀 등에 루비라 불리며 장식되었다.

영국 왕관 속 '흑태자 루비'의 정체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 흑태자의 루비가 왕관의 중앙에 장식되어 있다 / Public Domain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 흑태자의 루비가 왕관의 중앙에 장식되어 있다 / Public Domain
두 보석의 혼동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가 영국 왕실이 보유한 '흑태자의 루비(Black Prince's Ruby)'다. 14세기 카스티야의 왕 페드로 1세가 흑태자(Black Prince) 에드워드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흑태자의 루비’는 영국 왕실의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Imperial State Crown) 전면 중앙에 세팅되어 있다.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은 영국 왕실의 대관식과 국가 공식 행사에서 착용하는 왕관이다.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세계적인 보석들과 함께 세팅되어 있지만, 흑태자의 루비가 왕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수백 년 동안 많은 전쟁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거치며 왕과 여왕의 대관식에 사용된 이 왕관은 영국 왕실의 상징처럼 된 보물이다. 그런 왕관에 있는 보석이 실제로는 약 170캐럿의 스피넬이었다. ‘흑태자의 루비’는 더 이상 루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그 이름을 잃지 않았다. 루비라는 이름이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된 것이다.

루비와 붉은색 보석의 다채로운 세계

[좌] ‘팔미르 네크리스 3-로우’ 다이아몬드 110개, 핑크 사파이어 79개가 세팅되었다  [우] ‘투 버터플라이 비트윈 더 핑거 링’ 다이아몬드 36개, 핑크 사파이어 34개가 세팅되었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좌] ‘팔미르 네크리스 3-로우’ 다이아몬드 110개, 핑크 사파이어 79개가 세팅되었다 [우] ‘투 버터플라이 비트윈 더 핑거 링’ 다이아몬드 36개, 핑크 사파이어 34개가 세팅되었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과학적인 감정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루비와 스피넬을 혼동하는 일은 없다. 루비의 위상은 고품질 원석이 점점 희귀해지면서 더욱 높아지고 있다. 특히 미얀마 모곡산의 무처리 루비와 '피전 블러드(Pigeon Blood)'로 평가받는 최상급 루비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경매 시장에서도 꾸준히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경매 시장에서 팬시 컬러 다이아몬드에 버금가는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렇다고 다른 보석들의 가치가 떨어지기는커녕 오늘날 붉은 계열 보석의 세계는 더욱 깊고 풍성해졌다. 레드라는 고유의 강렬한 색으로 인해 스피넬과 가닛은 물론, 루비와 같은 커런덤 광물인 핑크 사파이어까지 저마다의 개성과 아름다움으로 사랑받고 있다. 과거에는 루비를 닮은 보석으로 여겨졌던 스피넬과 가닛도 이제는 독자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며 하이 주얼리 메종과 컬렉터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짝퉁 루비’가 아니라,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는 보석이 된 것이다.
[좌] ‘뻬를리 시크릿 펜던트 워치’, 루비 43개, 다이아몬드 40개, 화이트 마더 오브 펄이 세팅되었다.  [우] ‘뻬를리 컬러 링 3-로우’ 루비 9개가 세팅된 반지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좌] ‘뻬를리 시크릿 펜던트 워치’, 루비 43개, 다이아몬드 40개, 화이트 마더 오브 펄이 세팅되었다. [우] ‘뻬를리 컬러 링 3-로우’ 루비 9개가 세팅된 반지다 / 사진제공. 반클리프 아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시대를 초월해 아름다운 젬스톤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왔고, 사람들은 여전히 강렬한 붉은색 보석에 매혹된다는 점이다. 루비든 스피넬이든 가닛이든 붉은 보석은 힘과 열정, 권력과 사랑을 상징해 왔다. 그리고 그 붉은 세계의 중심에는 지금도 변함없이 '보석의 왕' 루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