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가불린16년과 책 / 사진. ©정인성
라가불린16년과 책 / 사진. ©정인성
오직 세 종류의 위스키만 판매하는 바(Bar)가 있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마스터는 세 개의 글라스에 위스키를 조금씩 따라 건네고, 손님은 맛을 본 뒤 하나를 선택한다. 가격은 어떤 잔을 고르든 모두 같다. 가장 비싼 위스키를 선택한 사람에게는 행운이, 반대로 저렴한 위스키를 고른 사람에게는 불행이 따르는 셈이다.

마스터는 이따금 값비싼 30년 숙성이나 한정판 빈티지 위스키를 섞어 내놓으며 행운과 불행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기도 한다. 다만 위스키의 브랜드와 숙성 기간은 비밀이기에, 손님은 자신의 행운과 불행을 당장 확인할 수 없다. 2008년 7월, 문예지 『현대문학』을 통해 세상에 소개된 단편소설 「중국식 룰렛」의 설정이다.

「중국식 룰렛」은 2016년 6월, 은희경 작가의 단편집 표제작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나는 그때 이 소설을 처음 알게 됐다. 당시 책바를 시작한 지 2년 차였던 나는 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던 터라,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책을 구해 읽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최근 들어 불행이 첩첩이 쌓인 인물이다. 아내는 우편으로 이혼 서류를 보내왔고, 의료사고를 주장하는 환자 가족과의 합의는 난항을 겪고 있다. 어느 날, 시름에 잠긴 그에게 바의 마스터인 K가 잠시 들르라며 연락을 건넨다. K의 바에는 검은 테 안경을 쓴 중년 남자와 은회색 아르마니 수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각각 홀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 역시 저마다의 깊은 불행을 안고 있었다. K가 주인공을 부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주인공을 포함한 세 남자를 바에 나란히 앉히고, 라벨 없는 위스키를 건네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중국식 룰렛'으로 불리는 이 게임의 룰은 단순하다. 한 사람이 질문을 던지면 지목된 사람은 대답을 해야 한다. 대답을 마친 뒤에는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단, 거짓말은 허용되지 않으며 만약 대답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위스키를 마실 수 없다. 귀한 위스키가 눈앞에 놓였기에, 이 자리에서만큼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 자체가 가혹한 벌칙이 된다. 이들이 주고받는 질문은 철학적이고 유치하다.
“당신에게 평생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당신이 가진 위스키 중 가장 비싼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 생애 최악의 날은 언제입니까?”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사이, 이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하고 어쩌면 조금은 얽혀 있을지도 모르는 인연의 끈을 가늠해 본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채로운 위스키가 등장한다. 나는 책을 읽다가 술이 등장하는 문장만 발견하면 인덱스를 붙이는 습관이 있는데, 덕분에 손이 분주해졌다. 그렇게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던 중, 유독 시선이 머물던 위스키가 있었다. 바로 이혼을 앞둔 주인공이 아내와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에 등장한 라가불린이다.
오로라 산장에서 라가불린 16년 / 사진. ©정인성
오로라 산장에서 라가불린 16년 / 사진. ©정인성
아내는 특별한 날에만 라가불린 16년을 마셨다. 언젠가 아내는 행복한 사람에게 특별한 날이란 기쁜 날이 아니라 슬픈 날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하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어쨌든 라가불린은 아내가 슬플 때 마시는 술이었던 것이다. 그 술이 품고 있는 바다냄새와 연기의 향이 자기가 자란 고향의 저녁 풍경을 떠올리게 해준다고도 말했다. (중국식룰렛, 은희경, 창비, p.36)

라가불린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위스키다. 책바를 오픈하기 직전 순례하듯 증류소 견학을 다녀온 경험이 있고, 인생의 버킷리스트였던 오로라를 마주했을 때 함께하는 위스키로 선택했을 만큼 좋아하는 위스키다. 이 문장을 읽은 이후부터는 라가불린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모를 애틋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라가불린 증류소 입구 / 사진. ©정인성
라가불린 증류소 입구 / 사진. ©정인성
1816년에 문을 연 라가불린은 스코틀랜드 아일라(Islay) 섬 남쪽에 자리 잡은 싱글몰트 위스키 증류소다. 이름은 다른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처럼 게일어에서 유래했는데, ‘방앗간의 움푹 팬 분지(hollow of the mill)’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라가불린이 위치한 아일라 섬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피트(Peat) 위스키의 성지로 알려져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일라 여행을 한 뒤 펴낸 에세이 제목을 『위스키 성지여행』(개정판 제목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라 지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일라 증류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위스키 제조 과정에서 피트(Peat)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말로 ‘이탄(泥炭)’이라 번역되는 피트는 늪지대의 식물들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은 채 수천 년간 퇴적 및 발효되며 형성된 일종의 석탄이다. 맥아를 건조할 때 이 피트를 태우면 짙은 스모키 향이 배어들게 된다.

이 때문에 아일라 위스키들은 특유의 강렬한 훈연 향을 뿜어내며 극단적인 호불호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 매력에 눈을 뜬 이들은 처음엔 ‘어라?’ 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이내 스며들듯 중독되는 평양냉면처럼 피트의 세계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만다. 나 역시 처음에는 ‘돈 주고 왜 이런 걸 사 먹지?’ 했다가, 어느새 피트 위스키를 사랑하게 됐다.
라가불린 증류소 테이스팅 룸 / 사진. ©정인성
라가불린 증류소 테이스팅 룸 / 사진. ©정인성
같은 섬 안에서 생산되더라도 어떤 대지와 물, 피트를 만나느냐에 따라 위스키의 스펙트럼은 넓어진다. 그 지점에서 라가불린은 가장 섬세하고 우아한 피트의 매력을 보여준다. 그 정점에 있는 제품이 바로 ‘라가불린 16년’이다. 이웃 증류소인 아드벡과 라프로익의 기본 라인업이 10년, 보모어가 12년인 것과 비교해보면 확연히 오랜 숙성을 거쳤다. 버번 위스키와 셰리 와인을 머금었던 캐스크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오랜 숙성이 선물한 깊고 균형 잡힌 풍미를 자랑한다. 공식 홈페이지의 테이스팅 노트는 다음과 같다.
향(Nose): 강렬한 풍미, 요오드 및 해초 향이 어우러진 피트 연기, 그리고 풍부하고 깊은 단맛.

바디(Body): 많은 소금과 해초가 어우러진, 피트로 가득 찬 길고 우아한 여운.

맛(Palate): 드라이한 피트 연기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단맛으로 입안을 채우고, 이어서 나무의 터치가 더해진 바다와 소금의 맛이 뒤따름.

여운(Finish): 많은 소금과 해초가 어우러진, 피트로 가득 찬 길고 우아한 여운.

무더운 여름에는 라가불린을 비롯한 피트 위스키가 잘 생각나지 않기 마련이지만, 장마철이나 유독 습도가 높은 날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런 날 바를 찾게 된다면 '라가불린 하이볼'을 주문해 보자. 탄산음료로는 진저에일과 탄산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라가불린에 진저에일을 섞고 약간의 라임 즙을 더한 하이볼은, 입안을 가득 채우는 스모키한 풍미에 달콤쌉싸름함과 상큼함이 어우러져 훌륭한 균형감을 선사한다.

만약 단맛이 없는 하이볼을 원한다면 탄산수를 붓고 그 위에 후추를 톡톡 뿌려 마셔보는 것을 추천한다. 흡연자라면,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날 어닝 밑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태울 때의 그 특유의 정취를 이 하이볼 한 잔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주 내내 내리는 비가 조금은 반가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