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 현장 모습 / 사진. © Comité Colbert
컨퍼런스 현장 모습 / 사진. © Comité Colbert
요즘 명품 쇼핑은 부티크의 문 앞도, 검색창도 아닌 채팅창에서 시작된다. 매장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AI에게 물어본 뒤다. 이 제품의 히스토리는 무엇인지, 리뷰는 어떤지, 내 옷장과는 어울리는지.

명품을 사기 전 AI를 먼저 찾는 소비자가 부쩍 늘었다. 중국 명품 구매자의 64%, 미국 구매자의 54%가 최근 구매 과정에서 AI를 사용했다. 에르메스, 샤넬, 까르띠에, 루이 비통 등이 참여하는 프랑스 럭셔리 메종 협회 코미테 콜베르가 베인앤컴퍼니와 함께 발표한 '럭셔리와 테크놀로지' 보고서에 담긴 올해 4월 조사 결과다. 눈여겨볼 대목은 '누가 쓰느냐'다. 명품 지출 최상위 그룹의 AI 사용률은 82%로, 중간 그룹(51%)과 지출이 적은 그룹(28%)을 크게 앞섰다. 명품을 가장 많이 사는 사람들이 AI를 가장 많이 쓴다. 온라인만의 이야기도 아니어서, 매장 구매자의 47%도 부티크에 가기 전 AI를 거쳤다.

VVIP들은 AI에게 무엇을 묻나

가장 흔한 용도는 구매 전 리서치다. 사용자의 64%가 제품과 브랜드를 물었다. 신제품의 소재와 무브먼트, 브랜드의 역사까지, 예전이라면 판매원에게 묻거나 잡지를 뒤졌을 질문들이다. 60%는 스타일링 조언을 구했다. 흩어진 리뷰를 요약해 달라거나 국가별 가격을 비교해 달라는 요청, 갖고 있는 옷에 맞춰 룩을 완성해 달라는 주문이 그 뒤를 잇는다.

이들이 꼽은 효용은 세 가지였다. 결정이 빨라졌고(68%), 품질과 핏을 확신하게 됐고(55%), 몰랐던 브랜드를 알게 됐다는 것(52%). 고가의 소비일수록 확신이 필요한데, AI가 그 확신을 매장 밖에서 미리 채워주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만은 예외다. 최근 명품 구매에서 AI를 썼다는 응답이 27%에 그쳤다. 파리의 소비자들은 여전히 부티크 문을 밀고 들어가 판매원과 눈을 맞추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파리 방돔 광장이나 몽테뉴 거리의 부티크에서 만난 베테랑 셀러들은 수치화된 데이터보다 고객의 미세한 취향 변화를 직접 읽어내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겼다. 기술이 업무를 보조하는 동안, 고객과 마주하는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와 인간적인 교감이 우선시된다.

매장에서 챗봇을 만날 수 없는 이유

사진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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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브랜드들은 왜 조용할까. 에르메스 매장에도, 샤넬 부티크에도 AI 챗봇은 보이지 않는다. 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뒤처진 게 아니라 일부러 감춘 쪽에 가깝다. 메종들은 AI를 활발히 도입하고 있다. 다만 쓰이는 곳은 사내 지식 관리와 IT, 소싱처럼 고객 눈에 띄지 않는 내부 업무이고, 고객 응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사람의 일로 남겨뒀다. 고객 응대 쪽에서 가장 활발하게 쓰이는 것도 판매원을 돕는 AI다.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챗봇이 아니라, 판매원이 응대를 더 잘하도록 옆에서 거드는 도구라는 얘기다.

이유는 럭셔리라는 산업의 생리에 있다. 코미테 콜베르와 베인은 업계가 속도와 완성도, 혁신과 전통, 존재감과 절제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 번의 실망도 용납되지 않는 고객을 상대하는 산업에서 사람의 손길이라는 코드를 기계에 넘길 수 없고, 몇 달 만에 낡아버릴 수 있는 기술에 브랜드의 얼굴을 맡길 수도 없어서다. 베네딕트 에피네 코미테 콜베르 사무총장은 "AI가 럭셔리에 주는 약속은 두 가지다. 지금의 운영 효율, 그리고 앞으로 고객 경험을 새롭게 만들며 얻게 될 성장"이라며 "이를 이루려면 비전, 그리고 경영진과 기술 조직의 긴밀한 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I가 아는 브랜드, 나만 아는 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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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소비자의 쇼핑을 바꾸고 있는 건 AI의 추천이다. 연구진이 검색 분석 기업 메이카이와 함께 소비자들이 생성형 AI에 던진 명품 관련 질문을 분석한 결과, 70%에는 브랜드 이름이 없었다. 예컨대 "30대 여성에게 어울리는 시계"라고 물으면 어떤 브랜드를 답할지는 AI가 정한다. 답의 근거가 되는 인용 출처의 90%는 브랜드 공식 사이트 바깥, 즉 전문 매체와 커뮤니티, 리뷰 같은 외부 콘텐츠였다.

결과는 예상 밖이다. AI 답변에 자주 등장하는 상위 30개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매출 50억 유로가 넘는 글로벌 대형 메종의 70%는 자신들의 시장 점유율만큼의 노출도를 확보하지 못했다. 오히려 소형 메종들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3~8배 자주 호명됐다. 생성형 AI는 규모나 광고비보다 브랜드가 쌓아온 이야기가 얼마나 한결같은지를 보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아는 백 대신 나만 아는 메종을 만나는 경로가 하나 더 생긴 셈이고, 사용자 절반이 AI의 효용으로 몰랐던 브랜드를 알게 된 경험을 꼽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디지털 컨시어지의 시대

AI를 써본 명품 소비자의 97%는 다음 구매에도 쓰겠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LLM을 "새로운 디지털 컨시어지"라 부른다. 브랜드를 소개하고 비교하며 조용히 구매까지 이끈다는 얘기다. 부티크에 들어서기 전에 살 물건이 얼마간 정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보고서 공동 저자인 조엘 드 몽골피에 베인앤컴퍼니 유통·럭셔리 부문 연구 총괄 디렉터는 "AI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객의 구매 과정 곳곳에 이미 스며들어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질문은 브랜드가 AI를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다. 고객들이 저만치 앞서 나간 시장에서, 메종들이 자사 사이트 인프라에만 골몰하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웹 생태계 전반의 디지털 자산을 어떻게 관리해 나갈 것인가다. 알고리즘이 브랜드를 큐레이션하는 시대, 럭셔리가 존재감을 증명하는 방식 역시 소리 없이 변화하고 있다.
[참고] 주요 참여 그룹 및 메종
까르띠에(Cartier), 롱샴(Longchamp), 로레알 룩스(L’Oréal Luxe), 로렌츠 바우머(Lorenz Bäumer), 루이비통(Louis Vuitton), 리치몬트(Richemont), 메시카(Messika), 발렌시아가(Balenciaga),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부르조아(Biologique Recherche), 부쉐론(Boucheron), 비오템/카리타(Carita), 셀린느(Celine), 샤넬 패션 부문(Chanel Fashion division), 에르메스(Hermès), 입생로랑 뷰티(Yves Saint Laurent Beauté), 지방시(Givenchy), 크리스챤 디올 뷰티(Christian Dior Parfums),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케링(Kering), 딥티크(Diptyque), LV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