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남편과 사별한 60대 김모씨는 이달 주거래은행을 방문해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했다. 자신이 사망하면 30억원 상당의 아파트, 3억원대 예금 등을 두고 아들과 며느리, 딸 사이에 상속 분쟁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김씨는 “치매로 정상적 사고가 불가능할 때를 대비해 재산 일부는 병원비로 사용하고 예금 1억원가량은 손주 학비로만 사용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며 “돈 때문에 자식들이 싸울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유언장 대신하는 신탁 계약

돈 때문에 자식들 원수지간 될라…"유언장 안 쓴다" 돌변
김씨처럼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입자 중심의 상품 설계가 매력으로 부각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 가입자는 금융회사와 맺은 계약서 한 장으로 자산 증식과 사후 관리를 해결할 수 있다. 유언장과 달리 증인이 필요 없고 가입자가 원하면 죽기 전까지 가족에게 내용을 알리지 않아도 된다.

보험금청구권 신탁도 비슷하다. ‘사망보험금 5억원을 한꺼번에 받지 않고 자녀가 30세가 될 때까지 매달 300만원을 생활비로 나눠 주라’고 계약하면 유언장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2024년 11월 사망보험금을 신탁으로 설정할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 시행령이 개정된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부동산과 예금 중심이던 상속신탁 범위가 생명보험으로 확대되자 보험사도 상속신탁 시장에 본격 뛰어들었다.

민법도 상속신탁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피상속인 재산 형성에 기여도가 낮은 형제자매에게 상속 재산을 강제 분배하는 기존 유류분 제도를 위헌으로 결정했다. 이어 올해 3월엔 피상속인의 재산 처분 자유를 확대하는 개정 민법이 시행됐다.

◇자산 인플레이션이 키운 상속신탁

무엇보다 자산 가격 상승이 상속신탁 시장을 키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국내 주식과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급등해 올해 상속세 과세 대상자는 3만 명을 훌쩍 넘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2000년 1400여 명에 불과하던 상속세 과세 대상자는 2020년 1만181명으로 처음 1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해 2만2524명으로 늘었다. 결정세액은 같은 기간 4조2294억원에서 8조9345억원으로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특히 고령층의 자산 증가 속도가 빨랐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해 60대 이상 가구의 주택 보유 비율은 68.5%로 가장 높았다. 39세 이하와의 주택 보유율 격차는 40.8%포인트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60세 이상 가구의 순자산액은 5억3591만원으로 전년보다 3.2% 증가했다.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단순한 사후 상속뿐 아니라 치매, 중증 질환 등 의사결정 능력이 상실됐을 때 본인 병원비 등을 함께 대비하려는 수요도 늘고 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돌봄 비용 부담과 세금 문제가 얽히며 유가족 간 상속 분쟁은 증가하는 추세다. 가족 간 다툼을 방지하려는 수요가 상속신탁으로 몰리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치매 머니로 상속신탁 시장 커질 것”

상속신탁 시장은 앞으로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 고령 치매 환자 자산이 170조원을 넘어서는 등 ‘치매 머니’ 규모가 빠르게 불어나고 있어서다.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치매 머니 규모는 172조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6.9%로 추산됐다. 2050년에는 치매 머니가 GDP의 15.6%인 488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때문에 국내 신탁 시장을 활성화할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법상 신탁업자가 신탁받을 수 있는 자산 유형엔 채무가 배제돼 있다. 주택담보부 대출이 있는 주택은 신탁 자산으로 인수할 수 없다는 얘기다. 보험에서도 일부 생명보험금 청구권만 허용해 치매보험 등은 신탁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이영경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고령자가 대출 없는 부동산과 현금성 자산에만 신탁을 설정하고 그 외 자산은 신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며 “치매 환자 자산을 폭넓게 관리할 수 있도록 신탁 대상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