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에서 환경 데이터가 새로운 자산으로 전이되려면 국가별 제도와 규제를 넘어 거래가능한 시장이 필요하다. 아시아 탄소시장의 미래는 국가간 이 연결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양한 협력과 실험이 축적되면 아시아 녹색금융은 점차 하나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다.
[한경ESG] 러닝 - 녹색 디지털 금융 따라잡기④·끝
기후변화 대응은 이미 한 국가의 과제를 넘어섰다. 탄소는 국경을 넘고 자본도 국경을 넘지만, 탄소 시장과 녹색금융 인프라는 여전히 국가별 제도와 규제 안에 분절되어 있다. 한국에서 인정된 감축 실적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투자자에게 신뢰 있게 통용되지 않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의 녹색 프로젝트가 한국과 일본의 자본시장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녹색금융은 충분한 규모로 성장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각국의 감축 노력과 투자 흐름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시아 차원의 공동 대응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한 자금 부족이 아니라 연결 부족이다. 좋은 자산도 연결되지 않으면 시장이 되기 어렵고, 좋은 정책도 연결되지 않으면 공동의 기후 대응으로 확장되기 어렵다. 아시아 탄소 시장의 미래는 바로 이 연결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통일보다 중요한 것은 연결이다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이면서 동시에 막대한 탄소 감축 투자가 필요한 지역이다. 한국과 일본은 제조업 비중이 높고 에너지 전환 비용이 크다. 이미 효율화가 상당히 진행된 산업에서는 탄소 1톤을 추가로 줄이는 비용, 즉 한계감축비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반면 아세안에는 재생에너지, 산림 보전, 메탄 감축, 에너지 효율 개선 등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감축 효과를 내는 프로젝트가 많다. 한국 기업이 국내에서 감축하기 어려운 부분을 해외의 검증된 감축 프로젝트와 연결할 수 있다면 비용 부담을 낮출 수 있다. 탄소 시장 연결은 환경 협력인 동시에 비용 절감, 투자 기회, 산업 경쟁력의 문제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보면 국제 감축의 비중이 크게 확대된다. 2035년 53% 감축 시나리오에서는 약 3000만 톤, 61% 감축 시나리오에서는 약 3400만 톤의 국제 감축이 필요하다. 이제 해외에서 신뢰할 수 있는 감축 실적을 확보하는 일은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한국의 중장기 탄소중립 경로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국제 감축 실적이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감축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그 감축 실적을 누가 보유하는지, 어느 국가의 NDC에 반영되는지, 이중계산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국제 감축 수요가 커질수록 신뢰할 수 있는 탄소 시장 연결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상호운용성이다. 상호운용성은 휴대폰 로밍 서비스에 비유할 수 있다. 각국의 통신망은 다르지만 로밍 시스템이 연결돼 사용자는 다른 나라에서도 통신한다. 탄소 시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배출권거래제, 일본의 공동 크레디트 제도(JCM), 싱가포르의 자발적 탄소 시장 인프라를 하나로 합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각 제도가 자기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감축 실적과 데이터가 서로 읽히고, 인정되고, 거래될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통합 없는 상호운용성’이다. 제도 통일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매달리기보다, 서로 다른 시장을 이어주는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탄소 시장 연결의 핵심은 데이터와 신뢰
탄소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특정 프로젝트가 실제로 탄소를 줄였다는 사실, 그 감축 실적이 어느 국가의 감축 목표에 반영되는지, 이중계산 위험은 없는지에 대한 신뢰다. 바로 이 때문에 탄소 측정·보고·검증(MRV)의 상호운용성이 중요하다. 국가마다 측정 방식과 보고 기준이 다르면 감축 실적은 비교되기 어렵다. 한국에서 검증된 감축량이 일본 투자자나 싱가포르 거래 플랫폼에서 신뢰받으려면 데이터의 형식, 검증 기준, 소유권 기록, 이전 내역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파리협정 제6조에 따른 국제 감축 실적 이전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만든다. 감축 실적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려면 해당 감축량이 실제로 발생했는지, 어느 국가가 그 실적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미 다른 곳에서 사용된 것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중계산을 막지 못하면 탄소 시장의 신뢰는 무너진다.
현재 탄소 크레디트 거래는 여전히 복잡한 서류 작업과 긴 검증 주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감축이 발생한 시점과 회계상 반영되는 시점 사이에 상당한 시차가 발생할 수 있고, 여러 기관과 국가가 관여할수록 확인 절차는 더 느려진다. 이 과정에서 거래비용이 높아지고, 투자자는 신뢰할 수 있는 가격을 형성하기 어렵다.
블록체인과 토큰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블록체인은 탄소 크레디트의 ‘디지털 등기부등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는 이 기록을 통해 ‘이 탄소 크레디트는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누구에게 이전되었으며, 이미 사용되지는 않았는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블록체인은 거래 속도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를 낮은 비용으로 증명하는 기술이며, 이를 통해 복잡한 서류와 수작업 확인에 의존하던 탄소 크레디트를 주식이나 채권처럼 믿고 거래할 수 있는 금융 자산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러나 모든 탄소 크레디트를 곧바로 토큰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품질이 낮은 크레디트를 디지털화한다고 해서 좋은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잘못 설계된 토큰화는 부실한 크레디트의 유통을 더 빠르게 만들 위험도 있다. 따라서 디지털화의 전제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MRV와 명확한 권리 구조다. 기술은 신뢰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신뢰를 더 빠르고 투명하게 이동시키는 인프라인 것이다.
아시아 녹색금융 네트워크를 향해서
이때 일본은 자연스러운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제조업 비중이 높고, 산업 전환 비용이 크며, 안정적인 해외 감축 실적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반면 아세안은 재생에너지, 농업 메탄 감축, 산림 보전, 에너지 효율 개선 등 다양한 감축 기회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자본과 감축 수요가 아세안의 검증된 녹색 프로젝트와 연결된다면, 이는 단순한 원조나 정책 협력을 넘어 하나의 시장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다. 기업은 감축 비용을 낮추고, 프로젝트 개발자는 투자 자금을 확보하며, 투자자는 수익성과 환경 성과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연결이 필요하다. 첫째, 기준의 연결이다. 각국의 녹색분류체계나 탄소 시장 기준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상호 비교 가능해야 한다. 투자자는 프로젝트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녹색 성과를 입증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데이터의 연결이다. MRV 데이터가 서로 다른 시스템 안에 갇혀 있으면 시장은 이를 활용할 수 없다. 감축량, 소유권, 이전 내역, 소각 여부가 표준화된 데이터 구조로 관리되어야 한다. 셋째, 금융 인프라의 연결이다. 발행, 거래, 결제, 보관, 사후 보고가 분절되어 있으면 탄소 자산은 충분한 유동성을 얻기 어렵다. 디지털 기술은 이러한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할 수 있다.
현실적인 접근은 작은 연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한·일 간 전환금융과 탄소 시장 협력, 한국·일본 자본의 아세안 녹색 프로젝트 투자, 파리협정 6.2조 기반 감축 실적 이전, 디지털 MRV 데이터의 상호 인정 같은 구체적 프로젝트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세안+3 디지털 채권 시장 포럼(Digital Bond Market Forum, DBMF)이 추진하는 아시아 탄소 시장 프로젝트는 하나의 의미 있는 실험이 될 수 있다. DBMF는 디지털 채권 시장 논의에서 출발했지만, 앞으로는 탄소 감축 실적과 녹색금융을 디지털 인프라로 연결하는 방안도 모색하고자 한다. 특히 탄소 감축 데이터를 측정·검증하고, 이를 금융 상품이나 투자 흐름과 연결하는 구조를 실험한다면 아시아 녹색금융의 상호운용성을 높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실험이 축적되면 아시아 녹색금융은 점차 하나의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다.
탄소 시장과 자본 시장, 녹색 프로젝트와 투자자, 국가별 제도와 역내 금융 인프라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될 때 아시아 녹색금융은 비로소 규모와 유동성을 갖춘 시장으로 성장할 수 있다. 1화에서 시작된 ‘신뢰’의 이야기는 결국 ‘연결’로 완성된다. 연결된 시장만이 더 많은 자본을 움직이고, 더 많은 자본만이 기후위기 대응을 현실로 만들어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