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틴베스트가 발간한「EU 디지털 제품여권(DPP)과 국내 대응 과제」는 DPP가 단순한 환경규제가 아닌 공급망 데이터 관리와 ESG 검증을 요구하는 새로운 무역 규범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국내 기업들이 규제 대응을 넘어 데이터 경쟁력을 확보해야 하며, 정부 역시 글로벌 표준과 연계된 공급망 데이터 인프라 구축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경ESG] 싱크탱크 리포트 ⑭ 서스틴베스트
유럽연합(EU)이 추진하는 디지털제품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 DPP) 제도가 국내 수출기업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한 환경규제가 아니라 제품 전 생애주기 데이터를 요구하는 공급망 규제로 진화하면서 국내 산업계 전반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박종만 서스틴베스트 연구원은 최근 발간한 <EU 디지털 제품여권(DPP)과 국내 대응 과제> 보고서에서 “DPP는 단순한 정보공개 제도가 아니라 공급망 추적성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데이터 검증 체계를 구축하는 데이터 거버넌스 전환의 핵심 과제”라고 진단했다.
EU는 2024년 발효된 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을 기반으로 2026년부터 디지털 제품 여권 제도를 단계적으로 도입할 예정이다. 소비자와 규제당국은 제품에 부착된 QR코드나 무선주파수 식별(RFID)을 통해 원산지, 소재 구성, 탄소발자국, 수리 가능성, 재활용성 등 제품 전 과정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보고서는 국내 산업계가 DPP를 여전히 환경규제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DPP는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 제품 설계부터 생산, 유통, 재활용에 이르는 전 과정의 데이터를 관리해야 하는 체계다. 대응이 늦어질 경우 EU 시장 진출은 물론 글로벌 공급망 참여에도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DPP는 철강, 알루미늄, 섬유·의류, 타이어, 가구 등으로 적용 범위가 확대될 예정이다. EU 집행위원회는 2025~2030년 작업계획을 통해 철강을 시작으로 주요 산업에 대한 의무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가장 시급한 분야는 배터리 산업이다. EU는 별도의 배터리 규정을 통해 2027년 2월부터 전기차(EV) 배터리와 산업용 배터리에 대해 디지털 배터리 여권(DBP)을 의무화한다. 배터리 원재료의 출처와 탄소 배출량, 재활용 정보까지 관리 대상에 포함된다.
박 연구원은 “DBP는 DPP 체계가 실제 산업 현장에 가장 먼저 구현되는 사례”라며 “EU의 탄소 규제와 공급망 실사, 순환경제 정책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작동하는 선행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비교적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삼성SDI와 LG에너지솔루션, SK온은 국제 배터리 협의체인 글로벌배터리얼라이언스(GBA)에 참여하며 공급망 추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삼성SDI는 제품 단위 탄소발자국 관리 시스템 구축에 나섰고,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블록체인 기반 공급망 추적 기술을 활용해 원재료 데이터 관리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
반면 철강 산업은 상대적으로 대응이 더딘 것으로 평가된다. 보고서는 포스코 사례를 분석하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대응에는 적극적이지만 향후 시행될 DPP에 대한 준비는 아직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박 연구원은 “CBAM 대응 과정에서 축적된 탄소 데이터를 활용해 향후 DPP 체계까지 연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섬유·의류 산업 역시 과제로 꼽힌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공급망 투명성을 강화하면서 원재료 출처와 재활용 원료 사용 여부 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국내 중소·중견기업들은 데이터 관리 역량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 연구원은 “DPP는 결국 기업의 ESG 경쟁력과 공급망 투명성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제도”라며 “개별 기업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의 표준 플랫폼 구축과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EU의 지속가능성 규제가 공시 중심에서 제품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ESG 보고서를 잘 쓰는 기업보다 제품 데이터를 투명하게 관리하는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뷰]
박종만 서스틴베스트 연구원 “DPP는 제품 규제가 아니라 데이터 규제”
- 최근 ESG 공시 규제(CSRD)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다양한 EU 규제가 논의되는 가운데, DPP를 핵심 의제로 선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약 1년 전 EU 옴니버스 패키지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유럽의 지속가능성 규제 전반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속가능제품 에코디자인 규정(ESPR)과 디지털제품여권(DPP)이 조만간 본격 시행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DPP는 아직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지만, 실제 영향력은 CBAM이나 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CSDDD),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에 버금갈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국내 기업들이 공급망 탄소 산정과 데이터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DPP는 앞으로 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이슈가 될 것으로 봤다.”
- 보고서에서는 국내 산업계가 DPP를 단순한 환경규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점이 가장 우려되는가.
“가장 큰 문제는 인식 자체가 향후 기업의 생존을 흔드는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ESPR 규제와 DPP 제도는 단순한 환경 규제나 비용 부담의 문제가 아니다. 제품과 공급망 데이터를 요구하는 새로운 형태의 무역 규범이라고 봐야 한다. 대응이 늦어질 경우 과징금 수준을 넘어 EU 시장 접근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더 나아가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 데이터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데이터를 제공하지 못하는 협력사는 공급망에서 배제될 가능성도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산업 구조를 고려하면 국가 경쟁력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 DPP를 ‘데이터 거버넌스 전환’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대부분 기업은 제품개발(PLM), 전사적자원관리(ERP), 공급망관리(SCM), 환경 데이터 시스템이 각각 분리돼 운영된다. 하지만 DPP는 이 모든 데이터를 하나의 제품 데이터 체계로 연결할 것을 요구한다. 앞으로는 제품 설계 단계부터 탄소 배출량, 원재료 정보, 재활용 정보 등 지속가능성 데이터가 함께 생성돼야 한다. 또한 협력사 데이터와 연동 체계가 필요하고, 이를 글로벌 표준에 맞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기업과 기업 간 데이터 호환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호환된 데이터가 국가 차원의 공급망 데이터 체계 안에 통합되어야 하며, 나아가 그 국가 단위의 데이터 체계가 다시 국가 간 공급망 체계와 호환될 것으로 예상된다.”
- EU가 추진하는 분산형 데이터 구조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중앙집중형 방식은 기업 입장에서 영업비밀 유출 우려가 크고, 규제당국 입장에서도 EU 전역에서 유통되는 수억 개 제품의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반면 분산형 구조는 데이터를 각 기업이 직접 보관하고 중앙 시스템은 데이터 위치와 접근 권한만 관리하는 방식이다. 소비자와 규제기관, 공급망 참여자에게 필요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제공할 수 있어 기업의 영업비밀 보호와 데이터 투명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 산업별 대응 수준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배터리 산업은 이미 2027년 디지털배터리여권(DBP) 의무화가 예정돼 있고 글로벌배터리얼라이언스(GBA) 같은 국제 협의체도 운영되고 있어 상대적으로 준비가 빠르다. 반면 철강과 섬유 산업은 2028~2029년 적용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적용 시점이 다소 남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데이터 인프라 구축에는 최소 2~3년이 소요된다. 지금부터 필요한 데이터와 부족한 데이터를 점검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EU ESPR Annex III’가 규정하는 데이터 카테고리를 기본 기준으로, 자사 업종에 적용되는 품목별 위임법령(Delegated Acts)까지 포함해 현재 자사가 어떤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고, 어떤 데이터를 협력사로부터 수집해야 하며, 어떤 데이터를 새로 생성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 중소·중견기업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중소 협력사들이 독자적으로 DPP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정부 차원의 데이터 인프라와 표준 체계 구축이 중요하다. 동종 업종 기업들이 공동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데이터 수집과 검증 체계를 지원해야 한다. DPP는 개별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 전체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과제다. 이러한 정부 지원을 토대로 동종 업종 중소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데이터 플랫폼을 공동으로 구축 및 활용한다면 실효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 한국 정부가 준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무엇보다 국가 차원의 공급망 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중요하다. 동시에 국내 데이터 표준이 EU 표준과 호환될 수 있도록 국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기업들이 각자 규제를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정부가 데이터 표준과 호환 체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국내 기업들의 대응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현재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추진 중인 한국형 에코디자인 제도를 조속히 법제화함으로써 국내 생산·유통 제품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DPP에 상응하는 데이터 공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 일본의 사례를 봤을때 한국이 데이터 주권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표준과 정합성을 맞추기 위해 어떤 국제적 협력을 취해야 하나.
“EU와 국가 간 표준 논의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국제 협력을 통해 EU DPP 표준과 호환 가능한 국내 통일 데이터 표준을 확립하고, 국내 기업들이 이를 공급망 데이터 구축 시 공통으로 따르도록 정부가 가이드하는 것이 핵심이다. 개별 기업이 각자 EU 표준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비효율적이고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쉽게 말하면, 국가가 표준의 구심점 역할을 맡아 기업들이 별도의 추가 노력 없이도 글로벌 공급망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2027년 이후를 대비해 기업들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경쟁력은 무엇인가.
“결국 핵심은 데이터다. 기업 내부에 원천 데이터가 존재하는지, 그 데이터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검증이나 플랫폼 연계는 이후 단계의 문제다. 우선 우리 회사가 어떤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고, 어떤 데이터가 부족한지를 파악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 산업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지속가능성 규제는 준비된 기업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기업에게는 시장 퇴출의 위험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규제가 시행된 이후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기업의 데이터 준비 수준을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실무자와 경영진 모두 규제 대응을 비용이 아닌 미래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 서스틴베스트는 국내 대표 ESG 평가·리서치 전문기관으로 기업의 환경(E)·사회(S)·지배구조(G) 성과를 분석한다. 2006년 설립된 이후 국내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ESG 등급 평가, 지속가능경영 분석, 책임투자(ESG 투자) 리서치 서비스를 수행해 왔으며,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투자자의 ESG 평가 및 의결권 행사 지원 업무에도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급망 ESG와 탄소배출, EU 지속가능성 규제(CBAM·CSRD·DPP 등) 대응 관련 연구를 확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