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커버 스토리 -K-GX, 산업 생태계 바꿀까
녹색전환, 공급망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2012년 3월의 마지막 날, 독일 마를(Marl)의 한 화학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회사 이름은 에보닉(Evonik). 일반 소비자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이 공장은 ‘PA-12’라는 특수 수지의 핵심 원료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자동차 연료 라인과 브레이크 호스에 들어가는 손톱만 한 부품의 소재다.

사고 발생 며칠 뒤, 지구 반대편 미국 디트로이트와 일본 도요타시(市)의 생산 라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GM·도요타·폭스바겐의 구매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남은 재고를 어떻게 배분할지 논의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세계 최대 자동차 기업들이 매출의 0.001%에도 못 미치는, 이름조차 생소한 공급자 하나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이런 회사를 ‘넥서스 공급자(nexus supplier)’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공급망의 급소, 넥서스 공급자

어떤 공급자가 중요한지는 그가 무엇을 보유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공급망 안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개념이다. 전략적 공급자는 ‘가진 것’으로 평가받지만 넥서스 공급자는 ‘위치’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자본도 첨단 기술도 많지 않은 3차·4차 협력사가 공급망의 급소를 쥐고 있을 수 있고, 에보닉처럼 규모가 큰 기업의 특정 공장 하나가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멈추면 공급망 전체가 흔들린다.

문제는 이런 길목들이 대부분의 기업 시야 밖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대체로 1차와 2차 협력사까지는 잘 알고 관리한다. 계약서가 존재하고, 감사를 하고, 어느 정도 통제도 한다. 운이 좋으면 3차 협력사까지 파악한다. 그러나 그 너머로 가면 안개와 같다. 제품에 들어간 광물이 어디서 채굴됐는지, 실은 어디서 생산됐는지, 원재료가 누구의 공정을 거쳤는지 끝까지 파악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공급망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기업 규모가 작아지고 동시에 시야에서도 멀어진다. 더욱이 이를 관리할 역량은 기업 규모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대기업은 전담 조직과 예산을 갖추고 있지만, 중견기업은 제한적이고 중소기업은 당장의 주문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들 모두가 하나의 공급망 위에 연결돼 있다.

사실상 현대 제조기업의 본질 자체가 그렇다. 애플은 전 세계에서 아이폰을 판매하지만 직접 운영하는 미국 아이폰 공장은 단 한 곳도 없다. 나이키도 대부분의 매출을 신발에서 올리지만 직접 신발을 생산하지 않는다. 이들은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라기보다 거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연결하는 기업이다. 현대 기업의 경쟁력은 소유보다 연결에서 나온다. 가공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한국 기업들 역시 이미 글로벌 공급망의 한 마디(node)다. 누군가의 협력사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기업의 원청인 셈이다.

규제보다 깊은 변화, 공급망 ESG의 시대

여기에 최근 새로운 변수가 더해졌다. 지속가능성 규제다. 흔히 유럽 이야기로만 여겨지지만 미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역은 한국 수출의 핵심 시장이다.

핵심은 ‘스코프3(Scope 3)’이라는 개념에 있다. 기업의 탄소배출을 측정할 때 자사 공장의 직접 배출(스코프1)이나 구매한 전력 사용에 따른 간접 배출(스코프2)뿐 아니라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하는 배출까지 책임 범위에 포함시키는 개념이다. 통상 한 기업 전체 배출의 70~90%가 스코프3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규제의 초점은 처음부터 기업 내부가 아니라 공급망 전체에 맞춰져 있다. 지속가능성 의제는 본질적으로 공급망 의제인 셈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규제가 다소 후퇴하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6년 초 발효된 이른바 ‘옴니버스(Omnibus)’ 패키지를 통해 공시와 실사 의무 적용 대상을 축소했고, 미국에서도 연방 차원의 기후공시 규정 폐지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겉으로 보면 규제가 강화되기는커녕 약해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EU는 제도를 개편하면서 상시근로자 1000명 이하 기업을 ‘보호 대상 기업(protected undertaking)’으로 규정하고, 대기업이 과도한 데이터 제출을 요구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명문화한 것이다. 이는 규제로 인한 부담이 공급망을 따라 아래로 전가돼 결국 가장 취약한 중소기업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정책 당국 스스로 인정한 결과이기도 하다.

법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법이 드러낸 구조적 현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담은 언제나 공급망을 따라 흐른다. 규제가 일부 후퇴한 자리에도 그 부담이 최종적으로 어디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협력사를 움직이는 힘이 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203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한 글로벌 기업들은, 규제 여부와 관계없이 협력사에 배출량 산정과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규제는 후퇴할 수 있어도 시장의 요구는 후퇴하지 않는다. 미국 연방 규정이 약화되더라도 스코프3까지 공시를 의무화한 캘리포니아의 주(州)정부 규제와 EU 기준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일시적인 정책 변화만을 보고 흐름 자체가 바뀌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더구나 EU가 마련한 보호장치도 어디까지나 법정 공시와 실사 의무에 관한 것이다. 고객사가 거래 조건이나 공급망 관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데이터 제출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법이 면제해 준 의무를 시장이 계약을 통해 다시 요구하는 셈이다.

위협의 윤곽은 분명하다. 공급망 리스크는 글로벌하며 그 부담은 가장 작은 기업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우리가 가장 잘 보지 못하지만 공급망 전체를 멈출 수 있는 넥서스 공급자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기업이니까”, “우리는 중소기업이라 해당 사항이 없다”는 식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대기업의 스코프3은 중견기업의 스코프1이고, 중견기업의 스코프3은 또 다른 중소기업의 스코프1이다. 규모는 더 이상 방패가 될 수 없다. 하나의 공급망에 연결된 이상 모두가 함께 버티거나 함께 흔들릴 뿐이다.

우리 정부도 ‘대한민국 녹색대전환(K-GX)’에 시동을 걸었다. 산업과 경제의 구조 자체를 저탄소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국가적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를 발전소의 연료를 바꾸고 대기업의 일부 공정을 개선하는 수준으로만 이해한다면 절반의 전환에 그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배출하는 탄소의 대부분은 공장의 담장 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공급망, 즉 3차·4차 협력사의 굴뚝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전환은 공급망 전체에서 일어난다. K-GX가 이름에 걸맞은 성과를 내려면 대기업과 중견·중소기업을 하나로 연결하는 ‘공급망의 대전환’이 되어야 한다.

마를의 공장 하나가 디트로이트를 멈춰 세웠듯, 다음 충격 역시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어느 협력사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규제의 시대에 공급망 내 구경꾼은 없다. 대기업도, 중견기업도, 중소기업도 모두 같은 그물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물은 언제나 가장 약한 매듭에서 찢어진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그 매듭을 함께 묶는 일이다.
녹색전환, 공급망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김명교 한양대학교 경영대학 교수(지속가능공급망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