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지방선거에서 반(反)넷제로를 내세운 영국개혁당이 대승을 거두며 영국 노동당 정부의 기후정책 추진 동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번 선거는 트럼프식 포퓰리즘과 반기후 정치가 유럽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글로벌 기후정책과 공급망에도 상당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경ESG] 글로벌 이슈
나이젤 패라지 영국개혁당 대표. /한국경제DB
“Net Zero is a scam.(넷제로는 사기다.)”
미스터 브렉시트(Brexit)이자 영국의 트럼프로 불리는 영국개혁당(REFORM UK) 대표 나이절 패라지(Nigel Farage)의 발언이다.
지난 5월 초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넷제로 폐기를 주장하는 극우 성향의 영국개혁당이 대승을 거뒀다. 영국은 매년 5월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의회 의원 일부를 새롭게 선출한다. 올해는 전체 약 1만9100여 명의 지방의원 가운데 136개 지방의회, 총 5066개 의석을 대상으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전 단 2석에 불과하던 영국개혁당은 이번 선거를 통해 전체 의석의 28%에 해당하는 1450여 석과 최소 10개 이상의 지방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반면 집권 노동당은 선거 전까지 압도적 과반을 보유했던 66개 지방의회 가운데 28곳의 지배권과 1100석 이상의 의원직을 잃는 참패를 기록했다. 합산 득표율에서도 노동당은 영국개혁당과 녹색당에 밀려 3위에 그쳤다.
일반적으로 지방선거는 내각제 국가의 총선이나 대통령제 국가의 대통령 선거만큼 즉각적인 정책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현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이자 향후 정치 지형의 방향을 가늠하는 풍향계라는 점에서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특히 총리의 권력 기반이 의회와 당내 지지에 연동되는 내각제 특성상, 이번 선거 결과는 키어 스타머 총리의 리더십 위기와 노동당 내부의 극심한 분열로 직결되고 있다. 이미 95명이 넘는 노동당 하원의원(MP)들이 키어 스타머 총리의 즉각적인 사퇴 또는 명확한 퇴임 일정 제시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 패배의 책임론과 정책 기조 수정 요구가 당 안팎에서 분출되면서, 노동당 정부가 추진하던 강력한 기후변화 정책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브렉시트당(Brexit Party)에서 영국개혁당으로
영국개혁당의 직접적인 모태는 테리사 메이 보수당 정부의 지지부진한 브렉시트 이행에 반발해 2019년 초 창당된 ‘브렉시트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정당은 창당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치러진 2019년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정당 득표율 1위(29석)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키며, 보수당 정권이 강경 브렉시트파인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선택하게 만드는 결정적 도화선 역할을 했다.
2020년 말 영국의 공식 유럽연합(EU) 탈퇴가 완료되며 창당 목적이 달성되자, 2021년 1월 당명을 ‘영국 개혁당(Reform UK)’으로 변경했다. 초기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봉쇄 조치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는 이민자 문제와 기후정책 반대에 집중하고 있다. 영국개혁당은 2024년 7월 하원의원 선거에서 14.3%의 정당 득표율로 하원 5석을 확보하며 제도권 정치 진입에 성공했고,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잉글랜드 중북부 주요 지방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실제 지방 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됐다.
이번 영국개혁당의 대승을 이끈 주역은 바로 나이절 패라지 당대표다. 패라지는 ‘영국의 트럼프’답게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의 연대는 2016년 8월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가결 직후 패라지가 미국 미시시피주에서 열린 트럼프의 대선 유세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트럼프는 패라지를 '브렉시트의 배후'이자 '유럽의 왕'으로 치켜세웠고, 패라지는 전통 백인 노동자층의 박탈감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 냈다. 같은 해 11월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 패라지는 외국 정치인 중 최초로 뉴욕 트럼프 타워를 방문해 당선인과 한 시간 동안 독대하기도 했다.
개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패라지의 정책은 트럼프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트럼프가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 화석연료를 더 캐내자)’을 외치며 파리협정 탈퇴와 화석연료 무제한 채굴을 선언했듯, 패라지 역시 영국의 ‘넷제로 전면 폐기(Scrap Net Zero)’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북해 유전 가속화와 셰일가스 프래킹 허용을 주장하고 있다. 반이민정책이나 포퓰리즘적 감세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영국개혁당은 공식 공약집인 ‘유권자와의 계약(Our Contract with You)’을 통해 2050 넷제로 목표 철회와 기후변화법(Climate Change Act) 폐기를 공식 정책으로 천명했다. 구체적으로는 매년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투입되는 100억 파운드 규모의 정부 보조금을 전면 삭감하는 대신, 북해 석유·가스 채굴 라이선스의 신속 발급과 시범 구역 내 셰일가스 수압파쇄법(프래킹)의 2년간 허용을 명시했다.
수송 분야에서는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계획 백지화, 전기차 의무 판매 비율 철폐, 초저배출구역(ULEZ) 및 저교통구역(LTN) 제도를 법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농업 분야에서는 재자연화(Rewilding) 연계 보조금을 식량 생산 목적의 직접 지불제로 전환하고 농지 내 태양광 패널 설치를 규제한다는 방침이다.
금융 부문 역시 영국 지속가능성 보고 표준(UK SRS)과 지속가능성 공시 요구사항(SDR)이 기업의 주주 우선주의와 수탁자 책임을 저해하는 관료주의적 장벽이라고 규정하며 이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불확실성의 시대, 흔들리는 기후정책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발전한다고 한다. 긴 호흡에서 보면 인류는 발전하고 있고, 결국에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간다는 의미겠지만, 문제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역사의 후퇴가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그리고 그 후퇴가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이번 선거 결과는 기후변화나 지속가능성 관점에서 보면 또 하나의 명백한 후퇴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트럼프의 반ESG, 반기후 정책에 맞서 국제 지도자 가운데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높이던 영국 노동당 스타머 총리의 입지가 바람 앞에 등불이라는 점이 더욱 뼈아플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경제력이나 국제적 영향력이 예전보다 많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국제사회와 유럽 국가들에 미치는 영국의 영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영국 정치 지형의 격변이 글로벌 정치와 경제, 그리고 기후변화 정책에 미칠 파장은 고스란히 글로벌 공급망에 묶여 있는 우리 경제와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탈탄소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명제는 인류가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후퇴는 언젠가는 극복되고 더 큰 전진을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극심한 불확실성과 변동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오는 11월에는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의 운명을 가늠할 수 있는 중간 선거가 예정돼 있다. 당분간은 각국의 정치환경 변화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