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냐 삼촌’으로 연극 무대에 처음 데뷔한 배우 고아성(왼쪽)과 이서진.  LG아트센터 제공
‘바냐 삼촌’으로 연극 무대에 처음 데뷔한 배우 고아성(왼쪽)과 이서진. LG아트센터 제공
“이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을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건드리는 감정은 중년을 휘감는 후회와 좌절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서도 실마리를 건네려 한다.

국내 공연계의 ‘바냐 대전’이 본격 막을 올렸다. 서울 LG아트센터의 ‘바냐 삼촌’과 국립극단의 ‘반야아재’(22~31일)가 이달 연이어 무대에 오른다. 먼저 링에 오른 것은 지난 7일 개막한 손상규 연출의 ‘바냐 삼촌’이다. 이서진·고아성이 데뷔 후 처음 공식 연극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바냐 삼촌’은 체호프의 원작을 충실하게 옮기는 데 집중했다. 이야기는 러시아의 한 시골 영지에서 펼쳐진다. 바냐는 조카 소냐와 함께 영지를 관리하며 죽은 여동생의 남편인 세레브랴코프 교수를 평생 뒷받침했다.

은퇴한 세레브랴코프가 젊은 아내 엘레나와 함께 영지로 돌아오면서 시골의 일상은 균열을 맞는다. 바냐는 세레브랴코프를 위대한 학자라고 믿었고 자신이 평범한 삶을 견디는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하지만 세레브랴코프와 함께 살면서 그 생각은 점차 무너진다.

은퇴식에 제자들이 별로 모여들지 않았다는 점, 집에서 쓰고 있는 글을 몰래 들여다보니 기대와 달리 형편없었다는 사실은 환멸을 키운다. 더구나 자신도 젊은 엘레나에게 점차 마음을 뺏긴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엘레나와 같이 살 수 있었던 인생을 남을 위해 써버렸다는 후회감이 그를 뒤흔든다.

이서진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바냐 아저씨를 인물을 풀어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익숙해진 배우의 이미지가 배역을 가리기보다는, 냉소와 체념이 뒤섞인 바냐의 성격과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고아성은 소냐의 감정선을 차분하게 쌓아 올렸다. 소냐는 아스트로프를 오래 사랑했지만 끝내 제대로 응답받지 못했다. 미숙한 짝사랑의 인물로 보일 수 있는 배역이지만, 고아성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는 소냐를 가벼운 이미지로만 남겨 두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는 결말부의 독백도 설득력을 얻었다.

손 연출은 인물이 내뱉는 후회와 냉소가 무겁게 가라앉지 않도록 생활감 있는 대사와 장면 전환을 살렸다. 공연은 31일까지 이어진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