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서현정의 CSO 열전④
아우렐리아 로셸 피게로아 브라이틀링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CSO)

‘서현정의 CSO 열전’은 서현정 더보드파트너스 대표가 글로벌 기업의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CSO)와의 심층 대화를 통해 지속가능 경영과 리더십, 그리고 전략의 교차점에서 기업이 어떻게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지 탐구하는 기획이다. AI·데이터 인프라(1화), 바이오테크·제약(2화), 글로벌 게임 산업(3화)에 이어, 4화에서는 스위스 럭셔리 워치메이킹을 다룬다. 140년의 전통과 급진적 투명성 정책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세계에서 지속가능성을 설계하는 사람을 만났다. — 편집자 주
브라이틀링이 희소성이 아닌 지속가능성을 택한 이유[서현정의 CSO열전④]
140년 전통의 럭셔리 시계 브랜드 브라이틀링(Breitling)의 지속가능성 전략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완벽한 숫자가 아니라, 공개된 숫자가 신뢰를 만든다.” 이 단순한 원칙은 럭셔리라는 산업의 본질적 모순, 즉 희소성과 과잉, 욕망과 책임 사이의 장력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우렐리아 로셸 피게로아는 2020년 브라이틀링 초대 CSO로 선임된 이후 업계 최초로 블록체인 기반 공급망 추적 시계를 출시하고, 브라이틀링을 에코바디스(EcoVadis) 플래티넘 메달(글로벌 상위 1%) 수상사로 만들며 럭셔리 업계 지속가능성의 기준을 새로 썼다. 아우렐리아 로셸 피게로아의 리더십 아래 브라이틀링은 템포리스(Temporis) 국제상 ‘최고 지속 시계’를 수상하기도 했다. BMW 재단의 책임 있는 리더(Responsible Leader), 유니레버 등 기업인들이 모인 글로벌 리더십 커뮤니티인 ‘이매진 톱100 체인지 리더(IMAGINE Top 100 Change Leader)’에 선정된 그녀를 서현정 더보드파트너스 대표가 직접 만났다.

아우렐리아는 현재 유엔(UN) 글로벌 콤팩트 스위스·리히텐슈타인 네트워크는 물론 자연 친화적·탄소중립 경제 전환을 목표로 하는 스위스 국제 지속가능성 재단인 빌라르 인스티튜트(Villars Institute)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서현정 × Aurelia Rochelle Figueroa
“럭셔리와 책임, 역설을 끌어안는 것이 나의 방법론이다”


서현정(이하 ‘서’): 당신의 커리어 여정이 이 지속가능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아우렐리아 로셸 피게로아(이하 ‘아우렐리아’) “이 여정은 제가 경제와 사회, 환경을 지속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리마의 불평등, 나이로비의 환경 파괴, 뉴델리의 공해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경험은 슬픔이면서 동시에 확신이었습니다. 인간의 창의성과 공감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으니까요. 자연은 제게 가장 위대한 교사이자 치유자입니다. 취리히 공원이든 알프스 산중이든, 자연 안에 있을 때 저는 다시 저 자신으로 돌아옵니다. 자연이 인류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는 150조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금융 시스템은 여전히 이를 제대로 셈하지 못합니다. 그 구조를 바꾸는 것이 제 일의 근간입니다.”

서: 독일 연방경제기후부, 지멘스, OECD를 거쳐 2020년 럭셔리 시계 브랜드를 선택했습니다. ‘왜 럭셔리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십니까.

아우렐리아 “저는 평생 긴장과 역설을 끌어안는 쪽을 선택해 왔습니다. 개발경제학에서 럭셔리로의 전환도 그렇습니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본질적으로 같은 일의 연속입니다. 지역사회와 자연을 연결하는 가치사슬을 설계하는 것이죠. 형태만 다를 뿐이에요. 럭셔리가 단순히 희소성이 아니라 가치의 표현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치가 지속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다면,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강력한 플랫폼이 됩니다.”

서: 지속가능성을 럭셔리 산업인 브라이틀링 안에서 어떻게 다룹니까? 럭셔리 산업이 지속가능성 전략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우렐리아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품이 책임 있는 공정의 이야기와 결합될 때, 제품의 가치는 더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소유자의 가치관이 그 제품을 통해 세상에 구현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럭셔리는 지속가능성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정성껏 만든 제품이 가장 책임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가치 창출의 핵심 동력이 됩니다.”

서: 1년에 한 번 공급망인 남미 금광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불법 채굴 현장까지 본다고요. 현장이 전략을 어떻게 바꿉니까.

아우렐리아 “현장 없이는 전략도 없습니다. 금 공급망 파트너들과 직접 발을 맞추지 않으면, 인권보호와 환경보전은 결국 문서 속 약속에 그칩니다. 현장에서 저는 열대우림이 전기톱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봤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을 본 이후, 브라이틀링의 공급망 전략은 단순한 소싱(sourcing) 문제가 아니게 됐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금을 사느냐가 아니라, 그 금을 캐는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으로 바뀐 것입니다.”

서: 공급망 파트너를 개발 파트너로 하는 베터 골드 펀드(Better Gold Fund)와 베터 다이아몬드 펀드(Better Diamond Fund)는 어떻게 설계됐습니까.

아우렐리아 “브라이틀링이 처음 이중 중요성 평가(double materiality assessment)를 실시했을 때, 세 가지 최우선 과제가 떠올랐습니다. 가치사슬의 사회적 임팩트, 환경적 임팩트, 그리고 제품 무결성. 이것이 공급망 파트너십을 설계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공급망 지역사회와 함께 버틸 수 있는 구조, 즉 공동 회복탄력성(shared resilience)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베터 골드 펀드는 금 1그램당 1.35달러, 베터 다이아몬드 펀드는 캐럿당 30스위스프랑(CHF)을 적립합니다. 이 돈으로 지역사회가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하고 추진하게 합니다. 소외계층 교육, 사회적 임팩트 리더 훈련, 환경보전 프로젝트 등이죠. 우리는 그 결과를 함께 추적합니다. 공급망 파트너를 관리 대상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동반자로 대하는 것입니다.”

서 블록체인 대체불가토큰(NFT)으로 금과 다이아몬드 공급망을 추적하는 ‘슈퍼 크로노마트 38 오리진스(Super Chronomat 38 Origins)’는 업계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브랜드 내부에서 이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우렐리아 “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공급망 전환의 운영 부담이 어떻겠느냐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의 한가운데, 아마존 유역 삼림 파괴가 급증한다는 뉴스가 연일 쏟아지던 그 시점이 아니었다면 이 도약을 감행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위기가 용기를 낳았습니다. 결과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출시 이후 500개 이상의 주요 매체에 소개됐고, 뉴스를 접한 인원은 추산 10억 명을 넘었습니다. 지속가능성이 ‘약속’이 아니라 ‘제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서: 채굴 다이아몬드 전면 폐지, 지역 소규모 수공업 채굴 방식인 아티사날 골드(artisanal gold)로의 전환을 이뤘습니다. 가장 강한 저항은 어디서 왔고, 조직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아우렐리아: “가장 강한 저항은 두 곳에서 왔습니다. 하나는 불확실성입니다. 시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제 운영의 문제입니다. 기존 공급망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었으니까요. 2020년 여름, 팬데믹의 비극이 절정이던 그 시점에 우리는 이 변화를 논의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위기의 실감이 논의의 무게를 달리했고, 결국 우리를 그 도약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가 자발적 언론 500여 건, 10억 명 도달이었습니다. 저는 동료들이 그 용기를 냈다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랜 전통의 브랜드도 지속가능성과 상업적 성공을 함께 이룰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됐습니다."

서: 천연 다이아몬드 채굴은 생태계 파괴와 인권 문제를 동반하는 럭셔리 업계의 핵심 과제입니다. 브라이틀링은 2026년까지 실험실 제조 다이아몬드(lab-grown diamond) 100% 전환을 선언했습니다. 현재 달성률은 42%입니다. 목표 미달을 스스로 공표하는 것은 어떤 원칙에서 나온 결정입니까.

아우렐리아: “투명성은 우리 브랜드의 핵심 원칙입니다. 달성률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숨기지 않는 것이 신뢰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격차가 생긴 이유는 명확합니다. 일부 소형 사이즈 다이아몬드는 아직 실험실에서 만들기 어렵고, 기존 제품 라인의 재고가 소진되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나아가 격차를 좁히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아닙니다. 실험실 제조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 집약적이기 때문에, 공급업체가 어떤 에너지를 쓰느냐가 곧 우리 전환의 질(質)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 구자라트(Gujarat) 공급업체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공동 자금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공급망 파트너의 과제를 그들만의 과제로 두지 않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파트너십의 의미입니다. 저는 투명성을 ‘수치(shame)에 갇히지 않겠다는 신호’라고 표현합니다. 숫자가 완벽하지 않을 때 오히려 공개함으로써 브랜드는 더 큰 신뢰를 쌓습니다.”

서: 42%를 공개했을 때 고객, 투자자, 파트너의 실제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우렐리아 “솔직히 말하면, 반응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고객은 우리의 정직함을 알아봤고, 투자자는 우리가 목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파트너에게는 믿고 함께할 수 있는 조직이라는 신호가 됐습니다. 가장 어려운 공개는 항상 ‘아직 답이 없는 것’입니다. 숫자가 나쁜 것보다, 왜 나쁜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격차의 이유를 항상 함께 공개합니다. 숫자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숫자가 의미하는 맥락과 다음 단계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 진짜 투명성입니다.”

서: 요즘 럭셔리 업계에서는 녹색 위장(그린워싱)보다 오히려 녹색 침묵(그린허싱)이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아우렐리아 “맞습니다. 2023년 전후로 그린워싱 비판이 거세지면서, 정작 지속가능성을 실천하는 기업들마저 스스로 입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잘못 말했다가 비판받을까 두려워서입니다. 그 결과 소비자는 정보를 잃고, 시장의 학습 속도는 느려집니다. 침묵은 시장의 진전을 멈춥니다. 솔직하고 의미 있는 소통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제품과 서비스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소비자가 알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지속가능성이 비로소 시장의 언어가 됩니다.”

서 “에코바디스 플래티넘, 과학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 검증 목표, 지속가능성 연계 대출까지 이 성과들을 최고재무책임자(CFO)와 이사회에게 투자수익률(ROI) 관점에서 어떻게 설득합니까.

아우렐리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합니다. 투자자에게는 지속가능성 목표와 연동된 금리우대 대출이 가장 직접적인 재무 성과입니다. 고객에게는 브랜드 신뢰와 프레스티지, 그리고 기존 고객층이 아닌 전혀 새로운 소비자들의 유입. 인재 측면에서는, 브라이틀링을 선택하는 신규 입사자들이 지속가능성 어젠다를 주요 이유로 꼽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속가능성이 비용이 아닌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은 결정적 순간은 2022년 슈퍼 크로노마트 38 오리진스 출시였습니다.”

서 브라이틀링의 지속가능성 전략은 눈에 띄는 매출 성장과 함께 했습니다. 조르주 컨 CEO 취임 이후 매출은 두 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이 성장에서 지속가능성 플랫폼이 기여한 몫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우렐리아 “지속가능성이 우리 성장에 직접 기여한 몫을 수치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슈퍼 크로노마트 38 오리진스 출시 당시 10억 명에 달하는 미디어 도달이 가능했던 것은, 지속가능성이라는 서사 덕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브랜드 인지도에 미친 영향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2022년 이후 럭셔리 시장이 어려워진 지금, 지속가능성의 역할은 오히려 더 중요해졌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브랜드에 더 충성합니다. 그 가치관과 함께 서 있는 브랜드는 단순한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브랜드에 대한 신뢰 자체를 파는 것입니다.”

서 기후변화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CFD)에 이어 자연 관련 재무정보공개 협의체(TNFD) 공시까지 도입한 극소수 기업 중 하나입니다. TCFD조차 낯선 한국 기업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아우렐리아 “규제 대응이 아니라 기회와 회복력의 관점으로 시작하세요. TNFD를 도입하고 처음 선명하게 마주한 것은 공급망 상류, 금 가공 과정의 수자원 문제였습니다. 그때까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던 리스크였습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기후 리스크로 인한 비용이 2025년 한 해에만 약 162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 리스크가 우리 대차대조표의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든 기업의 이사회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TCFD를 먼저 하고 나면 방법론이 몸에 배기 때문에, TNFD로 가는 길이 생각보다 수월합니다. 언제나 첫걸음이 가장 어렵습니다.”

서 스위스에 본부를 둔 글로벌 지속가능성 재단으로 매년 300명 이상의 CSO·과학자·정책 입안자가 모이는 빌라르 인스티튜트 이사회 멤버로서, 이사회실에서 CSO가 써야 할 언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아우렐리아 “시스템 리더십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수용(acceptance)’입니다. 변화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기존 시스템을 너무 빨리 거부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시스템이 지금 이 모습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지혜를 먼저 이해해야 변화도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사회실에서 CSO는 두 세계 사이를 걷는 사람입니다. 회사 안쪽을 깊이 이해하면서도 바깥의 눈을 잃지 않는 것. 그 균형이 없으면 이사회는 CSO를 ‘좋은 말 하는 사람’으로만 봅니다. 반면 회사의 언어로 리스크와 기회를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전략 파트너가 됩니다.”

서 한국은 세계 최대 1인당 럭셔리 소비 시장입니다. K브랜드가 프리미엄화를 추구하는 지금, 브라이틀링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하나를 꼽는다면.

아우렐리아 “취리히 리트베르크 박물관에서 열린 한류 전시회를 직접 관람했습니다. 한국 문화가 가진 깊이와 저력을 그 자리에서 새삼 실감했습니다. 한국 프리미엄 브랜드에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기원(origin)의 이야기’를 브랜드 서사의 중심에 놓으세요. 누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가. 한국 문화에는 그런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전 세계 소비자는 바로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아직 지속가능성을 비용이나 규제로 보는 경영자에게는 2030년 이사회실을 상상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서 묻게 될 질문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을 이제는 수탁자 의무의 문제로 다뤄야 합니다.”
브라이틀링이 희소성이 아닌 지속가능성을 택한 이유[서현정의 CSO열전④]
서현정의 코멘터리 | 수치(數値)가 수치(羞恥)를 이길 때

아우렐리아 피게로아와의 대화는, 내가 오래 품어 온 질문을 다시 꺼내게 했다. 지속가능성 전략이 실제로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는 흔히 이사회의 의지, 경영진의 결단을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그 전에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현장을 직접 보는 것. 치약 한 번의 장면을 잊지 않는 것. 숫자가 완벽하지 않을 때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

브라이틀링이 실험실 제조 다이아몬드(lab-grown diamond) 달성률 42%를 공개한 것은, 많은 기업이 목표 미달의 수치를 슬쩍 묻어두는 관행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이다. 이사회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이것은 문화의 선언이다. 불편한 숫자가 보호받는 조직, 진실이 불이익이 되지 않는 구조.

한국 기업의 이사회가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세 가지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는가가 아니라, 목표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가. 우리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관리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리스크를 직면하고 있는가. 우리는 좋은 숫자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불편한 숫자를 보고받고 있는가.

ESG 공시가 의무화될수록 경쟁력의 본질이 달라진다. 좋은 숫자를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불편한 숫자를 직면하고 그것을 전략으로 바꾸는 용기. 숫자를 감추는 조직은 리스크도 감춘다. 반면 숫자를 드러내는 조직은 문제를 먼저 보고, 먼저 움직인다. 브라이틀링이 42%를 공개한 것은 자기 고백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었다. 아우렐리아의 사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증거다. 그리고 이제 다음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서현정 더보드파트너스 대표
더보드파트너스(The Board Partners)는 국내 최초의 독립 이사회 자문 전문 기관으로, 글로벌 톱티어 거버넌스 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이사회 평가, 사외이사 교육, 이사회 자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현정 대표는 전 삼성전자 지속가능경영 상무, 글로벌 컨설팅사 ERM 한국대표, 한화자산운용 글로벌 전략팀장, 유엔 PRI 한국 대표 매니저를 역임한 지속가능 전략 및 거버넌스 전문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