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지배(The Rule of Empire)>
티머시 H. 파슨스 지음, 장문석 번역, 까치
역사의 패턴으로 상상해보기
민주주의를 거론하는 책이 “인문학 타령”으로 받아지는 이때, 시민으로 살기도 힘든데 신민(臣民)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중 하나가 계좌를 볼 때, 언젠가부터 달러로 환산해보는 버릇이다. 알량한 S&P500 ETF를 몇 주 산 뒤부터일까? 집값이 현상 유지를 한다고 해도 달러로 계산하면 하락이라고, 셈 빠른 친구가 말하더라. 일종의 글로벌 신민이라 할까.
갑자기 제1차 세계대전 시기를 묘사한 책 <몽유병자들>이 유튜브에 소개되고 인기를 얻고 있다. 평화의 시기에 역사서는 덕후들의 취미일 뿐이지만, 격동기에는 ‘최후의 독서가’도 역사의 패턴만 한 게 없다. 나는 세계의 일극이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지는 이 시기, <제국의 지배>란 책을 마주했다. 원서 기준 2010년 출간된 이 책은 제국의 운영 체계에 초점을 맞춰, 담담히 당시의 시스템을 복기해놓았다. 로마령 브리타니아, 이슬람의 에스파냐부터 나치 치하 프랑스까지, 역사 속 강력했던 제국들이 몰락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토마스 콜, 제국의 행로: 파괴, 1836.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제국 말기에 드러나는 민낯
김빠지게 모든 것에 생로병사, 사계절론을 붙이는 쪽은 아니다. 워싱턴대학교 교수인 저자는 외침이나 경쟁자 같은 외부 요소보다는 내부 오퍼레이팅으로 차근히 원인을 돌린다. 대갓집은 그 규모와 멋짐만큼 운영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 국방력도 갖춰야 하고, 그들이 바라보는 원시적인 피지배국을 계몽하기 위해 길도 닦아주어야 한다. 통화발행권을 쥔 황제는 세금과 공공 부채로 제국 체제를 돌아가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채 비율이 너무 높아지면 한계에 봉착했다. 그때 떠올린 방법은 피지배국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이때는 내전이 일어나고 정복 전쟁이 끝나 전리품의 유입이 끊기면서 로마 제국에 심각한 경제위기가 초래된 시기였다. 학자들은 이 위기를 왕조적 암투와 구조적 취약성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동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시민권이 보편화되면서 더 이상 하층신분으로부터 짜낼 것이 없어지고 조세수입이 줄게 되자 경제위기가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군대 유지비가 치솟고 공물과 세금은 곤두박질치자 황제들은 화폐를 마구 찍어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수단에 의존했다. 1세기에만 해도 97퍼센트였던 은화의 순도가 250년에는 40퍼센트로 떨어졌고, 270년에는 달랑 4퍼센트가 고작이었다. 그 결과 초인플레이션이 현금 기반 경제를 덮쳤고, 제국의 세리들은 현물 지급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301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임금과 생필품 가격을 고정시키는 법령을 반포하여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고 했으나, 이는 사실상 실행할 수 없는 조치였다. 세리들은 제국의 서부에서 세입이 뚝 떨어지자 읍과 시에서 세금을 걷는 데에 혈안이 되었는데, 여기서 제국 관리들은 충분한 세입을 확보하지 못하면 온갖 벌금을 물고 징발 조치에 시달려야 했다. 놀라울 것도 없이, 부유층과 특권층은 제국 당국의 추적이 잘 미치지 않는 시골로 떠나버렸다. 한편 자유농 대다수가 이 봉건 농장주들의 소작농이 되어 토지에 결박되었다. 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제국 세입의 3분의 2를 좀 더 부유한 동부 속주들에 의지하게 되었다. - ‘1장. 로마령 브리타니아:제국의 문명화 신화’ 중에서
티머시 H. 파슨스 <제국의 지배> 표지. / 사진 출처. 교보문고
로마 제국 말기의 사정에 굳이 추임새를 넣으면 이렇다. 경제 불황에 양극화가 심해진 제국은 세금 수입의 중심축이던 농업 자영업자 시민들이 추락해 세금이 줄어든다. 부유층은 조세피난처인 지역 농장으로 떠났고, 자유농은 그들의 소작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시대를 막론하고 제국의 말기는 비슷한 과정을 걷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다음은 나치 정권하에 협력한 프랑스 비시 정부 당시의 상황이다.
다른 모든 제국처럼 나치 제국 정권도 프랑스 경제에 기생했다. 나치는 제국 신용은행 증권들을 발행하고 통화를 조작하며(제국 마르크를 50퍼센트 평가절상하는 방식으로) 일방적인 결제 시스템을 운용하고 막대한 점령 비용을 전가하면서, 1944년에 점령 막바지 무렵에 프랑스로부터 대략 9,000억 프랑을 쥐어짜 냄으로써 산업화된 민족국가가 제국의 착취에 특히 취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프랑스 정부 수입의 거의 6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 엄청난 액수로 인해서 프랑스는 의심의 여지 없이 제3제국의 가장 가치 있는 보고였음이 입증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 금융 당국이 가짜 은행 증권을 돈으로 바꾸어 독일의 "구매품"에 대해서 프랑스 공급자들에게 변제해주기 위해서 수백만 프랑의 화폐를 찍어내자, 프랑스인들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가뜩이나 아픈 곳을 후벼 파는 격으로, 독일인들은 이런 일방적인 방식으로 프랑스 회사들의 주식을 매입하기까지 했다. (...) 프랑스인들은 이런 착취적인 정책에 분노했지만, 감히 독일인들에 대해서 공공연히 저항하지는 못했다. - ‘7장. 나치 치하의 프랑스:제국의 종점’ 중에서
이름은 세금이든, 관세든, ‘묻지 마’ 투자금이든 중요치 않다. 아마도 불황으로 화가 잔뜩 난 자국 시민들의 묵인 또는 공공연한 지지를 받고 제국의 황제는 “수탈”을 명한다. 자막에나 달릴 만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피지배국의 신민 중 얼마쯤은 정신이 번쩍 차려지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뼈에 사무치게 깨닫고, 한편에선 하던 대로 그저 황제국에 복종하라고 한다.
파슨스 교수는 피지배국 엘리트의 이중생활을 지적한다. 그들의 알뜰한 협조하에 제국 시스템이 무리 없이 돌아갔지만, 제국이 너무 막 나가면 그들부터 조세를 피해 지역 어디에 성을 쌓고 군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숨어버렸다. 역사는 늘 엘리트의 도피를 기록했는데, 지금 시대엔 그 모습이 어디서 반복되고 있을까. 오늘날엔 성을 쌓는 대신 무엇을 선택할까? 비트코인일까, 아니면 이민일까.
양해를 구할 말씀은 이 책은 절판되었다. 제국에 이입되어 승리감을 느낄 수 있는 책도 아니고, 피지배국 입장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책도 아니어서일까? 끊어진 책으로 칼럼을 써도 될까 싶지만, 이거야말로 몸피를 가진 책의 묘미다. 관심 있는 분은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