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선율들은 영화 속에서 웅장함을 더하기도 하고, 자유와 희망을 담아내기도 하며, 비극조차 장엄하게 물들인다. 누구나 이러한 장면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클래식 음악은 수많은 영화 속에 삽입되어 왔다. 그러나 반대로, 본래 영화음악으로 탄생한 선율을 클래식 작품 속에서 만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1897-1957)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Violin Concerto in D Major, Op.35)>는 영화음악의 선율이 클래식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 대표적인 예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출처. Wikimedia Commons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출처. Wikimedia Commons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는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내 ‘20세기의 모차르트’ 혹은 ‘새로운 모차르트’라고 불렸다. (사실 그의 부모가 이름에 ‘볼프강'을 넣어 지은 것도 모차르트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는 12세 무렵에 작곡한 발레 음악 <눈사람(Der Schneemann)>으로 음악계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고, 그 후로도 실내악곡과 오페라를 비롯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코른골트가 23세에 완성한 오페라 <죽음의 도시(Die tote Stadt, Op.12)>는 유럽 전역을 넘어 미국과 남미의 주요 극장에 오르며 큰 찬사를 받았다.

한편 1930년대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럽 정세가 요동치던 시기에 코른골트는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의 초청을 받아 영화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1935)>의 음악을 맡으며 할리우드로 향했다. 이후 그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와 협업하며 영화음악들을 작곡했고 <앤서니 애드버스(Anthony Adverse, 1936)>와 <로빈 후드의 모험(The Adventures of Robin Hood, 1938)>의 음악으로 두 차례 아카데미상을 거머쥐면서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99년 미국 우정청에서 발행한 ‘Hollywood Composers' 시리즈 우표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출처. Mystic Stamp Company
1999년 미국 우정청에서 발행한 ‘Hollywood Composers' 시리즈 우표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출처. Mystic Stamp Company
그러나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그를 클래식 음악의 작곡가로 인정받기 어렵게 만드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때문에 코른골트는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던 클래식 음악 작곡에 다시 전념하기로 결심했고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가 그 복귀의 첫 결실이 되었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악장의 주제는 코른골트가 이전에 작곡했던 영화음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코른골트 바이올린 협주곡 다장조 1악장. Moderato nobile (레이 첸의 연주)]

1악장 Moderato nobile의 첫 주제는 영화 <어나더 던(Another Dawn, 1937)>의 ‘이브닝 씬(Evening Scene)’ 선율에서 비롯되었다. 이 멜로디는 영화에서 사랑과 상실이 복잡하게 맞물린 장면에 쓰였는데 협주곡의 도입부에 등장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청중의 귀를 사로잡는다.

[영화 <어나더 던>의 ‘Evening Scene’ (1악장 첫 주제 선율)]

1악장의 또 다른 주제는 영화 <유아레즈(Juarez, 1939)>에서 가져온 것으로 황제 막시밀리안의 아내 카를로타가 비극과 절망 속에서 무너져가는 장면에 쓰인 선율이다. 바이올린 협주곡의 악보에서는 이 멜로디가 나올 때 템포 변화를 뜻하는 지시어들이 촘촘히 적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템포의 조절을 넘어, 애수에 젖은 노래처럼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 <유아레즈>의 ‘Maximilian and Carlotta’ (1악장 두 번째 주제 선율)]

[2악장. Romance (레이 첸의 연주)]

2악장 Romance(Andante)의 주제 선율은 영화 <앤서니 애드버스(Anthony Adverse, 1936)>의 ‘앤서니와 안젤라의 사랑(The Love of Anthony and Angela)’ 멜로디에서 비롯되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앤서니와 안젤라가 시골길을 달리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등장했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협주곡 안에서도 달콤하고 낭만적인 정서를 가득 담고 있는데, 솔로 바이올린이 선율을 노래하듯이 이끌어가며 ‘로망스’라는 제목에 걸맞은 서정성을 한껏 드러낸다.

[영화 <앤서니 애드버스>의 ‘The Love of Anthony and Angela’ (2악장 주제 선율 - 24초부터)]

[3악장. Finale (레이 첸의 연주)]

3악장 Finale(Allegro assai vivace)는 1, 2악장과 달리 영화음악의 선율로 시작하지 않는다. 8분의 6박자의 활기차고 리드미컬한 첫 주제가 진행된 후, 영화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1937)>의 메인 주제 선율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왕자와 거지>는 왕자 에드워드와 가난한 소년 톰이 서로의 신분을 바꿔 살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큼 ‘메인 주제(Main Title)’ 선율에서도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환상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협주곡의 초연자 야사 하이페츠(Jascha Heifetz, 1901-1987)의 요청으로 한층 화려해진 솔로 바이올린의 기교가 더해져, 마지막 악장은 눈부신 질주 끝에 찬란한 결말에 이른다.

[영화 <왕자와 거지> ‘Main Title’ (3악장 두 번째 주제 선율)]

이 작품은 1947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처음 연주된 후, 같은 해 뉴욕 초연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일부 평론가들은 ‘할리우드 협주곡(Hollywood Concerto)’이라 부르며 영화음악의 분위기가 짙다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청중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비평가들은 이 협주곡이 전통적인 클래식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바로 그 ‘할리우드적’ 색채가 오히려 20세기 음악의 개성으로 재조명되었다. 무대 위의 긴장감 넘치는 호흡 속에서 영화의 드라마틱한 서사와 환상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 곡은,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 코른골트의 음악적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걸작으로 남아있다.

이준화 바이올리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