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사람들은 ‘체코는 동유럽이 아니라 유럽의 심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실 지리적으로 보면 체코는 서유럽과 동유럽, 북유럽과 남유럽이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다. 특히 체코는 서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서 독일어권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 뒤에는 시련의 역사가 스쳐 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체코는 17세기부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지배를 받으면서 자주권을 잃었다. 또한 체코는 20세기에 나치 독일의 점령에 이어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런 격동기 속에서도 프라하는 파괴되지 않고 아름다운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블타바 강과 카를 다리. 강 건너편 언덕 위에 성 비투스 대성당과 프라하 성이 보인다. / 사진. ⓒ 정태남신비의 수열 135797531과 굳건한 돌다리
체코에서 가장 긴 강은 약 420킬로미터에 달하는 블타바(Vltava)다. 특히 체코의 국민주의 음악가 스메타나가 1874년에 작곡한 연작교향시 《나의 조국》의 두 번째 곡 <블타바>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강이다. 이 강은 내륙 국가인 체코의 젖줄이지만 가끔 범람하여 아름다운 프라하 시가지에 큰 위협을 주기도 한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블타바 강에는 12세기에 축조된 돌다리가 있었으나 1342년에 홍수로 파괴되어 유실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1346년에 독일계 룩셈부르크 왕가의 카렐 4세(독일식은 카를 4세, 1346-78)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즉위했고 1355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도 즉위하여 프라하를 방대한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런데 프라하는 동유럽과 서유럽을 연결하는 도시인데, 교역로를 잇는 다리가 없다는 것은 도시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프라하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대대적인 도시 및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웅대한 고딕양식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함께 블타바 강의 다리는 그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성 비투스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은 독일 출신의 페터 파를러에게 새로운 다리 건설도 위임했다. 당시 유럽은 전성기 고딕 시대였다.
블타바 강 양안을 연결하는 카렐다리. / 사진. ⓒ 정태남
새로운 돌다리는 길이 500여 미터, 폭 10미터의 규모로 16개의 아치와 급류로부터 다리를 보호하는 강력한 수문 장치로 이루어졌으며, 강의 수위를 고려한 공학적 계산이 동원되었다. 이 다리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소는 다리 양 끝에 세워진 고딕식 다리탑이다. 특히 구시가 쪽의 다리탑은 첨두아치, 세밀한 조각 장식, 위로 뾰족하게 솟은 탑신이 고딕의 수직성과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다리의 착공은 수열 135797531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카렐 4세는 착공 시점을 1357년 7월 9일 오전 5시 31분으로 정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보통 날짜를 달 앞에 쓰기 때문에 초석을 놓은 순간을 년-일-월-시-분 순서로 배열하면 1-3-5-7-9-7-5-3-1, 즉 대칭적 구조의 숫자 피라미드가 된다. 당시는 수비학과 점성술, 상징학이 건축 의식에 깊게 작용하던 시대로 건축의 초석을 놓는 순간은 성례적 의식이었다. 카렐 4세는 우주적 질서와 신의 섭리에 부합하는 시간과 수 위에 건축을 올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다리는 황제의 권력과 프라하의 위상을 드러내는 상징적 기념비 역할을 했다.
카렐 다리와 구시가쪽의 다리탑. / 사진. ⓒ 정태남고딕 구조와 바로크 조각
이 다리는 카를 4세가 1378년에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바츨라프 4세 때인 1402년에야 완공되었다. 그런데 이 다리를 예술적 차원에서 독보적인 공간으로 만든 것은 17세기 후반 이후에 세워진 성인들의 조각상들이다. 오늘날 다리 위에는 약 30여 개의 바로크 양식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는 마치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들이 강 위에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성인들의 조각상이 세워진 카를 다리의 새벽. / 사진. ⓒ 정태남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프라하 고위 사제 얀 내포무츠키의 동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왕비의 정조를 의심한 바츨라프 4세는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기를 거부한 얀 네포무츠키를 강물 속으로 던졌고, 그가 떨어진 지점 수면에는 5개의 별이 반짝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부조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소원을 빈다. 이렇게 다리 위의 조각들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과 민중의 의례를 담아낸 상징물로 기능한다.
사제 얀 네포무츠키 기념상. / 사진. ⓒ 정태남
그러고 보면 이 다리는 ‘고딕’과 ‘바로크’라는 두 시대의 예술이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사례다. 건축과 조각이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지만, 오늘날의 풍경 속에서는 완벽하게 융합되어 하나의 미학적 파노라마를 완성한다. 이처럼 이 다리는 건축과 예술, 권력과 신앙, 그리고 시민의 삶이 교차하는 특별한 장소로 고딕의 석조 아치가 보여주는 구조적 힘, 바로크 조각의 극적인 감정, 그리고 도시 풍경을 포착하는 시각적 장치는 모두 합쳐져 하나의 총체적 예술(Gesamtkunstwerk)을 이룬다.
한편, 이 다리는 오랫동안 단순히 ‘돌다리’, 또는 ‘프라하 다리’로 불리다가 체코의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19세기 후반에 들어 ‘체코의 아버지’ 카렐 4세를 기념하여 ‘카렐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이 다리는 축조된 이래로 블타바 강의 홍수로 인하여 여러 번 손상을 입긴 했지만 무너지지 않고 즉시 복구되었으며 또한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까지 600여 년 전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다리는 프라하가 지닌 신비스러운 힘, 즉 재난을 극복하는 힘과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다면 135797531이 정말 길조의 수열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