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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뒤 미래의 유물을 창조하는, 다니엘 아샴
다니엘 아샴 개인전 ‘기억의 건축’
현대미술에서 주목받는 미국 작가
'상상의 고고학' 독특한 세계관으로 작품 전개
현대미술에서 주목받는 미국 작가
'상상의 고고학' 독특한 세계관으로 작품 전개
존재는 세월 앞에 유한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는 닳고, 색은 바래기 마련. 어느 순간 이름까지 잊힌다. 떠올려 보자. 밀로의 비너스는 두 팔이 없는 채로 서 있고, 황동빛의 위용을 자랑했다던 자유의 여신상은 140여 년의 호흡 끝에 청록색으로 산화했다. 신라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는 반쯤 얼굴을 잃은 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유한하다고 해서 언제나 소멸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퇴색과 상실은 때때로 본질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를 예술이라 부르고, 예술을 담은 그릇을 유물이라 이름 붙인다. 사라진 팔의 모습을 상상하며 새삼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색깔에 아랑곳 않고 자유의 의지 되새기며, 반쪽짜리 얼굴에서 은은한 ‘천년의 미소’를 발견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 청담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기억의 건축’에선 이런 아샴의 예술적 세계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 특유의 미적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을 회화와 조각,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두고 페로탕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현대 문명의 오브제가 공존하는 작품들은 마치 미래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처럼 다가옵니다.”
그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다. 2017년 페로탕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졌고, 지난해엔 서울 신천동 롯데뮤지엄에서 출품작만 무려 250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회고전 당시 1000년 후인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로마 조각상을 내놔 화제였다. 한국을 배경으로 자신의 ‘상상의 고고학’을 펼친 작업을 선보이면서 아샴의 미학에 익숙해진 젊은 미술 애호가들이 많다.
지난해 롯데뮤지엄 전시에 비하면 페로탕 개인전의 규모는 다소 옹색할 수 있다. 출품된 작품이 몇 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도 다시 발걸음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부터 지속되고 있는 아샴의 가장 최근 작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고고학’이 어디쯤, 어떻게 왔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조각상 같지만 아샴답게 석고 물성이 아닌 고광택 스테인리스 스틸, 마치 수 백년 간 녹슨 것처럼 산화 처리된 청동, 따뜻한 색감으로 연마된 청동을 재료로 삼은 게 흥미롭다. 지중해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질감을 보여주면서도 고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료를 통해 독특한 조형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산화된 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의 반듯한 경계는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층위를 시각화한 것처럼 다가온다.
이보다 눈여겨볼 작품은 올해 새롭게 선보인 흉상 연작 중 하나인 ‘Stairs in the Labyrinth’(2025)이다. 어쩌면 그간 아샴이 선보였던 작업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캐스트샌드’ 모래조각인 이 작품들이 흉상에 대한 역사적 전례를 참조하면서도 동시대적 사고, 디지털 시대의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요소를 도입해 완성됐단 점에서다. 핸드 드로잉으로 조각을 구상한 다음 디지털 렌더링과 컴퓨터를 활용한 3D 프린팅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작업이다.
이를 두고 마이클 달링 전 시카고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고전 조각상이 우아함을 암시하는 동시에 르네 마르트와 에셔에게 영감 받은 인식의 퍼즐로 작품을 전개한다”면서 “건축적 디테일이 인간의 형상을 도발적으로 뚫고 지나가며, 이는 세밀한 관찰을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캐스트샌드 작품들은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향후 수년간작가 작업의 주요 탐구영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아샴의 작업은 향후 현대성과 미래성의 교차로 진화할 예정이다. 전시장 한켠에 일본풍의 분재 화분에 오디오 스피커를 결합한 습작이 이를 암시한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의 잎이 소리를 전달하는 구리선이다. 낭만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자리한 장난스러운 그의 세계관은 고고학자에서 미래학자로 바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