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일상에서 우주를 발견하는 법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멀리 가기 어렵다면 동네 산책길을 거닐어도 좋겠다. 길게 뻗은 메타세쿼이아길은 어느새 가을빛으로 물들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고 수백 개의 우주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썼다. 깊어가는 가을, 프루스트가 건넨 ‘다른 눈’을 따라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다.

1902년 10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을 본 프루스트는 훗날 미술 평론가 친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봤다”고 말했다. 1921년 5월, 그는 이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파리에서 열린 네덜란드 회화전을 찾았다. 천식을 앓아 기력이 크게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극심한 통증을 견디며 외출을 감행할 만큼 ‘델프트의 풍경’은 그에게 각별했다. 이 강렬한 체험은 소설 속 명장면으로 되살아난다.

소설 속 작가 베르고트는 ‘델프트의 풍경’의 노란 벽면이 유난히 뛰어나다는 평론가의 말을 확인하려고 전시장을 찾는다. 그리고 그림의 정교한 질감 앞에서 마지막 탄식을 내뱉는다. ‘나도 저렇게 글을 썼어야 했어. 여러 번 색칠을 해서 저 작은 노란 벽면처럼 그 자체로 섬세한 문장을 만들었어야 했어.’(<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갇힌 여인 1>, 민음사) 이 고백은 문장으로 그림을 그리듯, 문장을 덧붙이고 고치며 덧칠하듯 다듬어간 프루스트의 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 애호가인 프루스트는 미술 비평을 쓸 만큼 그림을 사랑했다. 페르메이르를 만나러 헤이그로 향했듯 카르파초의 그림을 보러 베네치아로,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러 파도바로 떠났다. 프루스트의 소설 속 생생한 묘사는 그가 본 무수한 그림에 빚진 결과물이다. 시시각각 바뀌는 빛에 따라 ‘대성당’을 그린 모네처럼 프루스트는 문장으로 일종의 ‘문학적 대성당’을 짓고자 했다.

프루스트는 또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엮어내는 음악 역시 그에게는 문학의 또 다른 원천이었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의 음악을 존경하고 숭배할 뿐 아니라 사랑에 빠져 있다”고 고백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세자르 프랑크의 현악사중주를 실황으로 듣고자 이른 새벽 파리 아파트로 연주자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소설 속 작곡가 뱅퇴유의 음악에는 포레, 프랑크, 생상스, 드뷔시의 선율이 고루 깃들어 있다.

작품 속 주인공 마르셀은 뱅퇴유의 칠중주를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색채와 형태로 감각한다. “흐릿하고 불분명한 유충 같았던 악절들이 지금은 찬란한 건축물로 변했다”는 묘사처럼 청각을 시각화한 프루스트의 유려한 문장은 독자에게 음악을 ‘보는’ 듯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마르셀은 이 음악을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장소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눈을 빌려 ‘다른 눈’을 갖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다른 눈’은 발길이 닿는 장소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다. 예술가의 시선을 빌려 일상을 다시 마주할 때,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수백 개의 우주를 발견할 수 있다. 대상은 그대로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성당처럼 거대한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마음에 남는 것은 단 한 장면, 한 줄의 문장일지 모른다. 그거면 충분하다. 베르고트가 익숙한 그림 속에서 작은 노란 벽면을 새로 발견했듯, 예술 작품의 작은 한 조각이 영혼을 흔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진정한 여행은 내 안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된다. 다시 새로운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