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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떼 칼럼] 클림트 '키스'가 있는 빈의 궁전
'전쟁 영웅' 오이겐의 벨베데레
전망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궁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
전망을 건축으로 끌어들인 궁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작가
궁전 앞에 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넓은 프랑스식 정원이 완만한 경사를 따라 길게 이어지고, 그 너머로 빈 시가지의 지붕들과 멀리 솟은 슈테판대성당 첨탑이 보인다. 대부분 평지인 빈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름부터 이 풍경을 말해준다. 이탈리아어 벨베데레(Belvedere)는 ‘bel(아름다운)’과 ‘vedere(보다)’가 합쳐진 말로, 좋은 전망을 품은 곳이라는 뜻이다.
벨베데레의 상궁과 하궁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하나의 장대한 축을 이룬다. 정원에는 꽃과 분수, 조각이 놓였고 힘과 지혜를 상징하는 스핑크스가 궁전의 바로크적 분위기를 강조한다. 상궁에서 내려다보면 정원의 축선은 하궁을 지나 빈 시가지로 뻗어나간다. 벨베데레는 전망 자체를 건축으로 끌어들인 궁전이다.
이 궁전을 세운 이는 오이겐공, 프린츠 오이겐(1663~1736)이다. 그는 왕족이 아니라 귀족으로, 프랑스 남동부 사부아가문 후손이다. 뛰어난 전략가지만 키가 작고 외모도 볼품없었다.
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군대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왕이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자 1683년 합스부르크 왕 레오폴트 1세 휘하로 들어갔다.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해 이름을 떨쳤으며, 1717년 베오그라드 전투 승리로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승리는 막대한 부를 안겨줬다. 그는 1690년대 빈 중심부 남쪽의 초지와 농지를 사들였다.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고 궁전과 정원을 한 축으로 구성하기 좋은, 확실히 잘 고른 터였다.
그는 이곳에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해 피셔 폰 에를라흐와 쌍벽을 이룬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1668~1745)를 불렀다. 먼저 하궁을 지었고, 정원은 앙드레 르 노트르의 영향을 받은 도미니크 지라르가 꾸몄다.
1717년 오이겐은 정원 위쪽에 더 화려한 상궁을 짓게 했다. 상궁은 손님을 맞고 소장한 예술품과 서적을 선보이는 공식 무대였다. 내부는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손길로 화려한 천장화와 프레스코, 조각 장식으로 꾸며졌다. 당시 상궁은 ‘정원궁전’이라는 뜻의 가르텐팔레(Gartenpalais)라고 불렸다.
하궁이 사적인 영역이었다면 상궁은 오이겐의 명성과 권력,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왕도 아닌 한 귀족이 왕실에 버금가는 궁전을 지은 것이다. 전쟁터에서 얻은 부를 건축과 예술로 바꿔놨다는 점에서 벨베데레는 오이겐의 삶을 압축해 보여준다.
1736년 오이겐공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자 궁전은 조카딸 빅토리아를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에게 팔렸다. 벨베데레궁이라는 이름도 이때 매매계약서에 처음 쓰였다.
한동안 비어 있던 벨베데레는 1776년 왕실 소장 미술품을 옮겨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1781년에는 오늘날 벨베데레 미술관의 전신인 공공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무너지고 궁전은 본격적인 미술관이 됐다. 하궁은 중세부터 바로크까지의 예술품을, 상궁은 오스트리아 근현대 미술품을 선보인다. 관람객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단연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앞이다.
우리는 지금도 상궁에 서서 오이겐공이 바라보던 빈의 풍경을 본다. 전장의 승리자 오이겐은 군대가 아니라 건축과 정원, 예술로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빈의 언덕에 그가 남긴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