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회장님 딸'로 출근한 지 20년이 됐습니다
K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의 삶은 언제나 화려하다. 젊은 나이에 번듯한 직함을 달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시 한마디로 임원들을 쥐락펴락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특히 대다수 중견·중소기업이나 가족경영 회사의 2세들이 마주하는 출근길 풍경은 드라마와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내가 겪은 일상은 화려함보다는 매일이 ‘생존과 증명의 시험대’에 가까웠다.

창업주 1세대는 대개 맨땅에서 피와 땀으로 회사를 일궈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들에게 회사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목숨과도 같은 분신이다. 그런 엄격한 창업주 밑으로 열정만 앞선 2세가 발을 들이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꽃길이 아니라 혹독한 훈련이다. “남들보다 두 배는 더 열심히 해야 본전”이라는 잣대 속에서, 다른 직원이라면 넘어갈 법한 사소한 실수도 창업주 앞에서는 가차 없는 불호령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2세들이 지독한 ‘인정 욕구’에 시달린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내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다’, ‘창업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성과를 보여주고 싶다’는 조급함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초기 2세 경영자에게는 실질적인 권한이 거의 없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추진하기 어렵고, 야심차게 올린 기획서는 “현장도 모르는 허황된 소리”라며 반려되기 일쑤다.

열정이 꺾이고 혼나는 일이 반복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비하가 고개를 든다. ‘나는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나’라는 자괴감이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이 고통스러운 간극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는 아버지와 일 안 해”, “어머니와는 도저히 말이 안 통해”를 외치며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2세들을 심심찮게 본다. 부모 자식 간 정마저 다칠 만큼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가족 경영 2세들이 겪는 진짜 성장통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그 매서운 시간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난 후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 아이 역시 자라면서 수많은 실수를 저지를 테고, 숱한 어려움과 마주할 것임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묘해서, 내 아이만큼은 그 어떤 시련도 겪지 않고 오직 탄탄대로의 성공만 걸었으면 하는 조바심이 앞선다. 그 안타깝고 애타는 마음은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잔소리가 되고, 날 선 질책이 돼 튀어나오곤 한다.

돌이켜보면 창업주의 그 유난한 엄격함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직원의 생계가 걸린 거친 파도 속으로 자식을 내보내며, 큰 상처 없이 온전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 그 모진 질책의 본질은 결국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는 20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겨우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머리로 안다고 해서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주하는 그 사랑은, 여전히 참 어렵고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