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르친 것과 배운 것
아들이 처음 한 말은 ‘바다’였다. 아빠도 엄마도 아니었다. 바다는 우리 집 개의 이름이었다. 돌이 지나도록 ‘아빠’를 가르쳐 보았지만, 그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대신 식구들이 온종일 부르는 개 이름이 먼저 나왔다. 아이는 부모의 의도와 상관없이 집에서 가장 자주 오가는 말을 알아서 배웠다.

십여 년 전 연구년으로 미국의 한 대학에 가 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직장에서 승진 요건으로 요구하는 교육학 학위과정의 과제가 있어, 한 학기 동안 파도를 다루는 대학원 수업을 참관했다. 대학원생들이 쓰는 연구실 한쪽에 책상을 얻어 지내던 터라, 수업이 끝나면 그 방 학생들에게 그날 강의의 요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곤 했다. 학생들의 대답은 내가 생각하던 교수님의 의도와 자주 달랐다. 이미 배웠을 거라며 교수님이 가볍게 짚고 넘어가신 수식에 학생들 마음은 가장 오래 머물렀고, “이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거듭 말씀하신 대목일수록 요점으로 꼽혔다. 교수님이 정작 그날 하고 싶으셨던 이야기는 학생들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그해 봄 모교에서 들은 세미나에서 발표자는 수식을 띄우며 “이건 몰라도 됩니다”라고 두 번 말했다. 이튿날까지 머리에 남은 것은 둘 중 내가 모르던 수식이었다. 몰라도 된다는 말이 오히려 그 자리에 눈을 붙들어 두었다.

이번 학기 공학 수학 강의를 다시 맡으면서 두 가지를 바꿨다. 그전까지 가르치던 복소해석을 빼고, 숙제 대신 게시판 과제를 냈다. 학생들은 매주 강의에서 생긴 질문이나 생각을 수업 게시판에 올리고, 수요일 수업에서는 그중 두세 편을 골라 함께 보며 토론하도록 유도했다. 첫 주 강의에서 그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는 가르치고 싶었다는 것, 그런데도 빼는 이유, 공학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 주 게시판에서 가장 큰 화제는 가르치지 않기로 한 복소해석이었다.

가르치는 쪽에는 의도가 있고, 배우는 쪽은 그 의도와 다른 것을 가져간다. 학생들이 가져간 것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교수는 그 수식을 끝내 빼지 못했고, 학생들은 그 망설임에서 교수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아챘다. 복소해석을 빼면서 그 무게를 길게 설명한 내게서 학생들이 들은 것도 그 망설임이었을 테다. 아이는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는 아빠의 입보다 온종일 개를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르친 것과 배운 것은 다르다. 그래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이번 학기 학생들은 복소해석을 배우지 않았지만, 선생이 무엇을 아까워하는지는 배운 모양이다. 답은 이제 기계가 넘치도록 준다. 어느 답이 중요한지는 답에 적혀 있지 않고, 가르치는 사람이 무엇을 아끼는지에서 드러난다. 답이 흔해진 시대에 선생에게 남은 일은 스스로 무엇을 아끼는지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