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차진엽 인터뷰
"몸은 명사 아닌 동사"...'바딩' 개념 제시
취임 후 첫 안무작 '빙빙빙' 12월 공개
"현대무용이라는 장르가 지금 이 시대에 더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타인과 비교·경쟁을 부추기는 한국 사회에서 나는 누구인지, 내 몸은 어떤 변화를 느끼고 있는지 몰입할 때 진정한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장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어떤 예술 장르에 '현대'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대중의 시선에는 '낯섦'이라는 필터가 덧씌워지곤 한다. 현대무용 역시 그런 선입견이 존재하는 장르 중 하나다.
최근 한국경제신문 아르떼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차진엽(48) 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은 "현대무용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인 건 분명하다"면서도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이 장르가 지닌 본질적인 힘을 강조했다. 자꾸만 타인을 향해 흔들리는 시선을 오롯이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도록 돕는 예술, 그것이 바로 현대무용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5월 국립현대무용단 단장에 취임한 차진엽은 본래 발레를 전공했다. 서울예고 재학 시절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매력에 빠져 진로를 바꾼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과 영국 런던 컨템퍼러리댄스스쿨을 거치며 독보적인 무용수로 입지를 다져왔다.
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장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발레는 정말 경이로운 예술이에요. 완벽함에 도달하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야 하죠. 현대무용은 정형화된 움직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체 표현을 탐구해 온 만큼,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져요. '내 몸은 다른데, 왜 모두가 똑같은 동작을 해야 할까'라고요. 팔을 뻗고 다리를 곧게 펴는 것만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꺾거나 구부리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고, 그게 나의 표현일 수 있잖아요. 각자의 고유함을 찾아가려는 정신이 현대무용에 깃들어 있죠."
차 단장의 작업은 무대 위 작품 창작을 넘어 현대무용의 개념과 철학을 대중에게 체화시키는 것으로 확장된다.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제시한 '바딩(Bodying)'이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오랜 사유가 집약된 결과물이다. "우리 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요. 타인과 공간,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응하고 변화하며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현재진행형(ing)을 붙였어요."
이러한 철학을 담아낸 것이 이달부터 4주간 이어지는 무용단의 기획 프로그램 '바딩/바딩'이다. 안민정 시각예술가, 장동선 뇌과학자 등 다양한 장르의 전문가들과 함께 몸에 대한 탐구를 다각도로 이어간다.
차 단장은 "현대무용을 단순히 무대 위 공연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 자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며 "관객들이 공연 관람에 그치지 않고 자신에 대해 깊이 사유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했다.
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장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최혁 기자
차 단장은 내년 신규 프로그램의 하나로 국제 교류도 구상하고 있다. 프랑스 낭트 국립안무센터(CCNN) 등 해외 안무 기관과의 협력을 염두에 두고 국내 안무가의 해외 파견과 해외 안무가의 국내 초청을 통한 장기 교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수개월간 현지에 머물며 그 지역의 삶과 문화를 깊이 탐구할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에요. 서로 다른 문화적 시선이 담긴 안무를 무대에서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
차 단장에게선 '무대 위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풍긴다. 지나치기 쉬운 일상 속 경험과 질문을 토대로 작품의 첫 단추를 꿰기 때문이다. 오는 14일 서울 강동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리는 그의 안무작 '백조의 잠수: Ritardescendo'(2024년 서울시발레단 초연)도 마찬가지다. 그는 물속의 느린 움직임에 몰입했던 프리다이빙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몸의 언어로 풀어냈다.
"속도라는 것은 상대적인데, 내 기준에서 누군가의 속도를 재단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의 속도를 인정하는 게 요즘 들어 중요하다고 느껴져요. 무용수들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어떤 흐름대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는 동작을 훈련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까요?" 차 단장이 요즘 천착하고 있는 화두는 '나'를 넘어 '사회'로 향한다. 오는 12월 11~12일 서울 중구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콘솔레이션 홀에서 선보이는 '빙빙빙(BEING BEING 氷)'에도 이러한 존재론적 질문을 마주할 수 있다. 전통적인 공연장을 벗어나, 과거 천주교 박해와 순교의 역사가 깃든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취임 후 첫 안무작을 선보이는 것이다.
차진엽 국립현대무용단장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사진=최혁 기자
"종교적 의미가 있는 곳이긴 하지만, 역사를 직접 재현하기보다 그 장소에 축적된 시간과 존재의 흔적 속에서 지금 내가 어디에 어떻게 서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에요. 사라졌지만 한때 존재했던 몸, 현재 살아 숨 쉬는 몸,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몸이 같은 공간 안에서 겹겹이 쌓여간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던진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도 맥이 닿아 있죠."
현대무용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유영해온 지 어느덧 30여년. 차 단장에게 현대무용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해 나가는 과정이다.
"생각이나 마음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고 관찰해 작품으로 담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질문을 계속 이어 나가며 깊이를 축적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