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세계 최대 가스전 발견
자원수출 호황…공공지출 늘려
고물가·고임금에 기업실적 악화
노사정 "공멸은 막자" 손잡아
비용 부담 줄자 고용·투자 회복
네덜란드 북동부 도시 흐로닝언. 1959년 세계 최대 육상 가스전이 발견된 곳이다. 이달 중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2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이곳에는 갈라진 벽돌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었다. 지역 주민이 가스산업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웠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천연가스 채굴로 겪은 지진 피해를 표현했다. 작년까지 이곳엔 천연가스 발견 기념비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가스 생산이 중단되면서 함께 철거됐다. 이 지역에서 천연가스 발견은 축복이 아니라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가스 대박에 가려진 위기
흐로닝언의 조형물은 네덜란드가 겪은 ‘자원의 저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 네덜란드 정부는 가스산업으로 막대한 수입을 거둬들였다. 1969년 2억유로 미만이던 천연가스 관련 수입이 1981년 87억유로로 급증했다.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했다. 가스를 판 돈이 쏟아져 들어오자 네덜란드 정부는 사회보장비 등 공공지출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1965년 GDP의 34.7%이던 공공지출이 1980년 51.9%로 급증했다.
네덜란드에서 처음 천연가스전이 발견된 지점에 세워진 ‘갈라진 벽돌’ 조형물. 채굴 과정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지역 주민이 입은 피해를 표현했다. 천연가스 발견 기념비는 지난해 철거됐다. 정영효 기자
수출 호황에 정부 지출 확대까지 겹치며 물가가 치솟자 근로자들은 물가상승률 이상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1970년대 소비자물가가 연평균 7.1% 오르는 동안 시간당 임금은 12.6%씩 상승했다.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통화가치도 급등했다. 1970년 달러당 3.62길더이던 환율은 1980년 1.99길더로 급락(길더 가치 상승)했다. 그 결과 1970~1982년 네덜란드 제품의 가격경쟁력은 이웃 독일보다 34% 뒤처졌다. 당연히 기업 실적도 악화했다.
비용과 생산성의 괴리는 투자 위축으로 이어졌다. 1981년 기업의 총고정투자는 1년 만에 10.8% 급감했다. 1970년 6.1%이던 성장률은 1981년 -0.8%, 1982년 -1.2%로 추락했고, 실업률은 1979년 4.1%에서 1983년 9.6%로 치솟았다. 쿤 퇴링스 전 위트레흐트대 교수는 “(고용이 불안해지고 사회보장제도는 강화되면서) 1985년 노동인구 일곱 명 중 한 명은 노동급여를 받으며 일하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감세로 대타협 뒷받침
네덜란드 경제를 위기에서 건진 건 사회적 합의였다. 1982년 11월 24일 체결된 바세나르협약이다. 파산 위기에 몰린 기업, 실직 위험에 노출된 근로자, 국가 경제 파탄을 눈앞에 둔 정부가 한 걸음씩 양보해 만든 결과물이다. 노조는 임금 인상을 절제하고, 기업은 임금 인상 재원을 근로시간 단축과 고용 확대에 활용하는 게 핵심이었다.
바세나르협약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기존 일자리를 더 고르게 나누는 것이 비용 증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이다. 기업의 취약한 재무 상황을 고려해 일자리 확대 비용을 사측에 떠넘기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협상을 주도하는 대신 감세와 사회보장 개혁으로 타협을 뒷받침했다. 이에 기업의 노동 비용 가운데 세금·사회보험료 비중을 뜻하는 ‘조세격차’가 1983년 48%에서 1998년 41%로 떨어졌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은 줄고, 근로자의 실수령액은 늘었다는 뜻이다.
바세나르협약 효과는 한계에 다다른 기업의 비용 부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임금 상승률은 1982년 7.3%에서 1983년 2.3%, 1984년 -0.1%로 떨어졌다. 1984년 노동생산성이 3.2% 높아지는 동안 실질 노동비용은 1.4% 줄었다. 이에 기업 총고정투자가 1983년 6.8%, 1984년 9.0%, 1985년 14.8% 등으로 극적으로 증가했다. 1975년부터 1982년까지 25만 개 줄어든 민간 일자리가 1983년부터 1990년 사이에 50만 개 늘어났다.
알렉산더 하이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바세나르협약이 경제를 마비시키던 임금·물가 악순환을 효과적으로 끊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