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바세나르협약 체결식에 크리스 판베인  회장(왼쪽 두 번째)과 빔 코크 위원장(세 번째)이 나란히 앉아 있다.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82년 바세나르협약 체결식에 크리스 판베인  회장(왼쪽 두 번째)과 빔 코크 위원장(세 번째)이 나란히 앉아 있다.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1982년 11월 18일 빔 코크 네덜란드노총(FNV) 위원장이 크리스 판베인 사용자단체(VNO) 회장의 바세나르 자택을 찾았다. 판베인 회장의 초대로 성사된 비공식 협의였다. 5년 전만 해도 코크 위원장은 TV 토론에서 판베인 회장과 같은 테이블에 앉기조차 거부했다. 반대쪽 테이블에 앉아야 노사가 치열하게 대립한다는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1979년에는 노사 합의로 잠정안을 마련하고도 ‘지나치게 많이 양보했다’는 산별 노조의 반대로 무산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병’이 절정에 달하면서 노사 모두 ‘공멸만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두 사람의 논의는 주말까지 이어졌다. 1979년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양측 임금 전문가를 불러 초안을 마련하고, 일일이 산하 조직의 동의를 얻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의 역할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뤼트 뤼버르스 총리는 노사가 합의하지 못하면 정부가 직접 개입하겠다고 압박했다. 합의 실패의 비용을 분명히 함으로써 정부는 협상을 주도하지 않으면서도 합의를 촉진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정부가 직접 참여하는 3자 기구이다 보니 당사자와 조정자 역할, 합의의 책임까지 모두 떠안는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의 운명을 바꾼 바세나르협약은 그해 11월 24일 판베인 회장의 자택에서 남서쪽으로 8㎞ 떨어진 경제사회평의회(SER) 회의장에서 공식 체결됐다.

전문가들은 노사가 대등한 ‘교환조건’을 주고받은 점을 바세나르협약의 성사 비결로 꼽는다. 박 교수는 “노조는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대가로 근로시간 단축과 일자리 배분을, 사용자 측은 수익성 회복을 투자와 고용 증대로 연결한다는 약속을 받아들였다”며 “서로 무엇을 내주고 얻는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내부 구성원을 설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바세나르·헤이그=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