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 ‘비의(秘儀)’ /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 ‘비의(秘儀)’ / 아트선재센터 제공
자동차 엔진에 사람의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얽혀 있다. 여러 방향으로 뻗은 손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도움을 요청하듯 허공을 향한다.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불상을 연상케하지만, 성스럽다기보다는 기괴하고 불안하다. 일본 현대미술가 고이즈미 메이로(50)가 만든 조각 ‘비의(秘儀)’(2026)다. 그는 “현대인은 자신이 가진 힘보다 더 큰 힘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을 보여준다"며 "기계와 결합한 인간이지만 어딘가 어긋난 불편한 상태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는 26일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의 제작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국내 첫 개인전인 '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가 27일부터 12월27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고이즈미는 2021년 영국의 주요 현대미술상인 아르테스 문디 9를 공동 수상한 유명 작가다. 작품은 뉴욕 MoMA, 런던 테이트, 홍콩 M+ 등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돼 있다.

그는 최근 영상과 퍼포먼스를 넘어 조각으로 작업 영역을 넓혔다. 그는 “현대사회는 스마트폰을 통해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회가 됐다”며 “AI나 테크놀로지로는 읽어낼 수 없는 것이 있다. 손으로 직접 잡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실체 없는 생성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물질을 직접 만지고 다루는 조각 작업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는 설명이다.

영감의 원천은 불교 조각상이었다. 고이즈미는 사찰에서 마주한 불상들이 때로는 두렵고 괴물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여러 개의 팔과 손을 지닌 모습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를 봤다. 불상의 여러 팔은 부처의 초월적 능력을 상징한다. 그는 이를 인간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되려는 욕망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그 욕망은 기술을 대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닮았다. 고이즈미는 “옛날 불상이 보여준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조각의 중심에 인간 기술의 상징인 자동차 엔진이 자리잡은 이유다.

엔진에서 뻣어나간 팔과 손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함도 담았다. 엔진과 신체는 서로 어긋난 채 불편하게 연결돼 있다. 그는 “인간의 몸과 기계가 자연스럽게 결합하면 그저 인간 기계처럼 보일 뿐”이라며 “기술이 주는 불편함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 ‘증언의 천사들’ /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의 작품 ‘증언의 천사들’ / 아트선재센터 제공
이 작품을 비롯해 2차세계대전의 기억과 인간 신체를 탐구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고이즈미는 과거사에 대해서도 불편함을 던진다. 이번에 전시한 3채널 영상 ‘증언의 천사들’(2019)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출신 곤도 하지메(1920~2021년)의 증언을 토대로 제작했다. 곤도는 과거 자신이 속했던 부대가 저지른 민간인 살해와 성폭력 등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증언했다.

고이즈미는 16~20세인 11명의 젊은 일본인에게 곤도의 증언을 외우게 한 뒤 도쿄 도심에서 낭독하도록 했다. 곤도가 중국에 파병됐을 때 나이가 20세, 가미카제로 투입된 파일럿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한다. 그들의 목소리로 신주쿠와 긴자 등 현대적인 도쿄 풍경 속에서 수십 년 전의 폭력이 되살아난다.
고이즈미 메이로의 '증언의 천사들.' 아래에선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출신 곤도 하지메가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증언하는 내용의 30분짜리 영상이 재생된다. 위에선 그의 증언을 따라 16~20세 젊은 층의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의 '증언의 천사들.' 아래에선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일본군 출신 곤도 하지메가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증언하는 내용의 30분짜리 영상이 재생된다. 위에선 그의 증언을 따라 16~20세 젊은 층의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 아트선재센터 제공
그는 “일본인 중에는 우리가 항상 사죄해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며 “하지만 무엇에 대해 사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이야기하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영상으로 증언을 기록한 이유도 설명했다. “증언이 글로만 남으면 책꽂이에 꽂힌 채 잊힐 수 있습니다. 계속 살아 있는 증언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으로 2021년 영국 현대미술상 ‘아르테스 문디 9’를 공동 수상했다.

일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에서 출발한 목탄 드로잉 ‘안개’ 연작도 전쟁의 망각을 다룬다. 전후 일본의 평온한 일상 장면을 그린 뒤 일부를 지워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 전쟁의 흔적을 환기한다.

작가·건축가 7명이 참여하는 '버티컬즈'와 김희천·이하령·홍승택의 '2mc1dj: 사건 볼륨 3', 조각가 최하늘의 개인전 '최하늘: 이갈이'도 같은 날 아트선재센터에서 개막한다.

'버티컬즈'는 상승과 권위, 힘을 상징하며 남성성의 은유로 읽혀온 '수직성'을 재해석하는 전시다. 구나·김민훈·이다미·이립·전우진·최고은·황수연이 여성과 퀴어의 신체와 감각을 바탕으로 조각과 설치를 통해 '서 있음'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2mc1dj: 사건 볼륨 3'은 약 96분짜리 '화면 없는 영화'다. 가상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을 배경으로 대사와 음악, 효과음만으로 극을 이끈다.

'최하늘: 이갈이'는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움직이는 몸에 주목한다. 작가의 첫 키네틱 작업을 포함한 신작 조각 12점으로 몸과 의식의 관계를 되묻는다.

'2mc1dj: 사건 볼륨 3'은 12월 6일까지, 나머지 세 전시는 12월 27일까지 이어진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