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비웃던 '바나나 작가' 카텔란, 현대카드를 디자인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현대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6)은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하나다. 그는 바나나 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두고 이게 작품('코미디언')이라며 판매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나나를 어마어마한 값에 사간다. 202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이 작품은 620만달러(약 83억원)에 낙찰됐다.

카텔란은 상식을 깨는 작품과 행동 뒤에 사회적 금기와 권위, 자본주의 시스템 등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숨겨둔다.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 스타일 덕분에 대중적 인기도 높다. 2023년 리움미술관은 카텔란의 대규모 전시로 25만명 넘는 관객을 끌어모아 개관 이후 최다 관람객 기록을 썼다. 관객의 절반 이상이 20~30대였다.
돈을 비웃던 '바나나 작가' 카텔란, 현대카드를 디자인했다
그런 카텔란이 이번에 또 황당한 일을 벌였다. 현대카드가 출시하는 카드를 디자인한 것이다. 바나나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가치'란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조작되는가"를 다룬 그가 자본주의의 총아인 신용카드에 자신의 작품을 박아넣었다. 자기모순을 즐기고 과시하는 '미술계의 문제아' 카텔란다운 행보다. 그에게 이번에 출시되는 카드와 작품세계에 관해 물었다.

"모순은 해결될 필요가 없다"

현대카드는 15일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협업해 제작한 '마우리치오 카텔란 크레딧 카드'를 출시한다고 밝혔다. 카드 디자인은 신분증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카텔란이 만들어낸 가상의 국가에서 쓰이는 신분증이라는 콘셉트"고 말했다. 위조 방지 홀로그램은 '코미디언' 작품의 바나나 모양으로 돼 있다.
돈을 비웃던 '바나나 작가' 카텔란, 현대카드를 디자인했다
▶돈 놀음을 비꼰 바나나를 카드 위조 방지 장치로 썼다.
"그 모순이 흥미로웠다. '코미디언'을 발표했을 때는 사람들이 '바나나가 너무 비싸다'며 싸웠는데, 이 카드에 들어간 바나나는 신용 거래를 허락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모순 아닌가. 사실 모순이란 건 해결될 필요가 없다. 거기서 예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카드로 결제하는 순간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신분증처럼 생겼으니 계산원이 '죄송해요, 신분증을 주셨네요'라고 할 수도 있다.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끝나는 결제에 인간적인 상호작용을 넣고 싶었다."

신용카드는 '돈을 쓴다'는 느낌을 가장 덜 들게 하는 결제수단이다. '삑' 소리가 난 뒤 즉시 결제가 끝난다. 카텔란은 여기에 몇 초짜리 걸림돌을 놓아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왜 하필 신분증인가. 이 가상의 나라의 규칙은 뭔가.
"신용카드 회사를 하나의 국가로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국가엔 상징·문서·시민·규칙이 필요하다. 첫 번째 법은 '공화국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 모두 환영하지만, 유난히 진지한 사람은 국경에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제'.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말의 모습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무제'. 벽에 머리를 박고 있는 말의 모습이다.
▶국가의 문장(紋章)으로 벽에 머리 박은 말, 바닥에 머리 박은 타조를 넣었다.
"일반적인 국가들은 힘과 자신감을 상징하는 사자·독수리를 쓴다. 여기선 앞으로 가지 못하는 말,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타조를 썼다. 끔찍한 동물들이라서 좋다. 카드 소지자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을 꽤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만 명이 공유하는 카텔란의 얼굴들

카텔란은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즐겨 쓴다. 리움미술관 전시에도 밀랍 인형 '위(We)' 등 자기 얼굴을 본따서 만든 작품들이 여럿 나왔다. 다만 카텔란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아이디어만 내고 제작은 다른 사람이 맡는다.
2023년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무제'.
2023년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무제'.
이번에 출시한 카드도 마찬가지다. 카드 사진 자리에 들어가는 얼굴은 'CATT'라는 이름의 캐릭터들이다. 카텔란은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직접 편집하지 않고, AI로 변형해 남성형 캐릭터 셋과 여성형 캐릭터 셋을 만들었다. 회원은 자기 사진과 CATT 중 하나를 골라 카드에 넣을 수 있다.

▶이번 협업에서는 실제로 무엇을 했나.
"디자이너라기보다 아트 디렉터에 가깝게 일했다. 가상 국가,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캐릭터, 그리고 카드가 사람들이 이미 아는 무언가를 닮아야 한다는 생각은 내가 했다. 현대카드 디자인랩이 그 아이디어를 가공하고 걸러서 완전한 시스템으로 만들었다. 내 일은 방향을 정하는 것, 현대카드의 일은 그 방향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었다."
카드에 들어가는 카텔란의 얼굴들.
카드에 들어가는 카텔란의 얼굴들.
▶여섯 캐릭터 중 진짜 당신에 가장 가까운 얼굴은 누구인가.
"아무도 아니고, 동시에 모두다. 나는 오랫동안 대역과 대리인을 써서 내 정체성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들어 왔다. 그런 면에서 AI는 매력적인 도구고, 재미있는 공범이다. AI는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다만 그중 무엇을 남길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어려운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한다."

▶수만 명이 지갑에 당신 얼굴을 넣고 다니게 된다.
"약간 께름칙하다. 하지만 카드가 '정체성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한다'는 점은 마음에 든다. 다른 누군가가 내 얼굴을 지니고 다니지만, 카드는 그 사람의 것이니까. 부탁은 딱 하나다. 내 얼굴로 책임감 있게 소비해 달라."

▶그렇다면 당신이 살면서 가장 잘 한 소비는 무엇인가.
"가장 후회되는 구매는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한다'고 스스로 믿어서 샀던 것들이다. 가장 잘 쓴 돈은 시간에 쓴 돈이다. 여행, 식사, 방, 티켓,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원하는 곳에 있게 해 준 모든 것. 사물은 대개 가치가 떨어진다. 시간은 반대로 갈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리움미술관에 나왔던 운석 맞은 교황 조각.
리움미술관에 나왔던 운석 맞은 교황 조각.
리움미술관 전시에 나왔던 무릎 꿇은 히틀러 조각.
리움미술관 전시에 나왔던 무릎 꿇은 히틀러 조각.

"농담은 진실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

▶운석에 맞은 교황, 무릎 꿇은 히틀러, 황금 변기…. 당신은 뭘 만드는 건가.
"친숙한 뭔가에서 시작해 단 하나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다. 교황은 서 있어야 한다. 히틀러는 약해 보여선 안 된다. 변기는 금으로 만들어지면 안 된다. 나는 언제나 '확신에 균열이 생길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흥미를 느껴 왔다."

현대카드가 이번에 출시한 카드의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신용카드는 신용카드처럼 생겨야 한다. 하지만 카텔란은 그 규칙을 비틀어, 남의 얼굴을 넣은 신분증 모양의 카드를 디자인했다. 카텔란은 "바나나('코미디언') 앞에는 경비원이 서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돈을 비웃던 '바나나 작가' 카텔란, 현대카드를 디자인했다
▶바나나를 먹는 사람이 계속 나온다. 지겹지 않나.
"처음에는 놀랐다. 이제는 아무도 먹지 않으면 오히려 놀라울 것 같다. 어느 시점이 되면 반복은 해프닝이 아니라 의식(儀式)이 된다. 나는 이제 작업의 그 부분을 통제하지 않는다. 아마 그게 더 건강한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먹는 덕분에 작품이 더욱 화제가 된다. 사례라도 해야 되지 않나.
"맞다. 하지만 그들도 공짜 점심을 먹었으니 쌤쌤이다."
카텔란의 황금 변기 작품.
카텔란의 황금 변기 작품.
인기가 높은 만큼 신랄한 비평도 카텔란을 따라다닌다. '한 줄짜리 농담과 키치'(미국 비평가 제리 살츠), '광대'(영국 비평가 조너선 존스) 등이 대표적이다. 금 변기 '아메리카'는 지난해 11월 소더비 경매에서 1210만달러(약 162억원)에 팔렸다. 산 곳은 미술관이 아니라 기이한 물건을 모아 보여주는 '리플리스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이었다.

▶당신 작품은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아메리카'는 늘 예술 작품이자 작동하는 변기였다. 흰 벽의 전시장, 그리고 신기한 물건의 진열장은 우리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신이 시장을 비웃을수록 시장은 작품을 더 비싸게 산다.
"내가 해온 모든 일이 소유하고 거래하기에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장은 적응력이 극도로 뛰어나다. 공격을 가하면 결국 그 공격마저 팔려고 든다. 시장이 거부하는 작품은 아직 포장하는 법을 알아내지 못한 작품일 뿐이다."

▶당신은 그저 광대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동의하나.
"유머와 즉흥성이 내게 중요하다는 점은 맞다. 어렵다고 해서 저절로 깊어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하는 농담이 재미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농담은 보통 덜 웃긴 무언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일 뿐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