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윤, 퍼레이드 파라디,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제공
레이첼 윤, 퍼레이드 파라디,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제공
경기 용인의 호암미술관은 국내에서 가장 예스러운 분위기의 미술관 중 하나다. 본관 건물은 전통 한옥 모양이고, 앞에는 전통 정원도 있다. 전시 역시 1982년 개관 이후 고미술에 주력해왔다. 2023년 재개관 선언 이후 김환기·루이스 부르주아 등 현대미술가들의 전시를 열었어도 고풍스러운 이미지는 여전했다.

그런데 요즘 호암미술관이 확 달라졌다. 입구의 주차장부터 일본 주차장 회사인 타임즈의 노란 간판 여러 개(사이드 코어의 '타임 게이트')가 보인다. 본관 외벽에는 일본 만화의 이미지(요코야마 유이치의 '플라자')가, 앞뜰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야자나무 모양의 설치 작품(레이첼 윤의 '퍼레이드 파라디 II')이 자리잡았다. 모두 지금 열고 있는 전시 '2026 아트스펙트럼'에 나온 톡톡 튀는 출품작들이다.
사이드 코어, 타임 게이트
사이드 코어, 타임 게이트
아트스펙트럼은 리움미술관이 2001년 시작한 청년 작가 발굴전이다. 올해는 아시아 10개국 작가 23명(팀)의 작품 63점을 모았다. 호암미술관에서 이 전시가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곽준영 리움미술관 현대미술연구실장은 "엄숙한 호암의 분위기를 역동적으로 바꿔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올해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프랑스 파리의 현대미술기관 팔레 드 도쿄와 공동 기획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곳의 큐레이터 위고 비트라니(39)가 곽 실장, 전효경 리움미술관 큐레이터와 공동 기획했다. 비트라니는 "젊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두 기관의 공통점이 있었다"며 "아시아 작가들에 대해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작가 일부는 팔레 드 도쿄가 프랑스 정부, 퐁피두센터와 함께 내년 여는 미술제 '캥케날'에도 나갈 전망이다.

2024년 영국 최고 권위 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한 인도계 작가 자슬린 카우어, 중국 작가 루오판 첸 등 아시아계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이동현의 원숭이 모양 설치작품과 김지수가 호암미술관에서 찍은 영상 작품, 박웅규의 그로테스크한 회화 등 국내 유망 작가들의 작품들도 있다. 전시장 가이드가 입은 유니폼도 작품이다. 패션 브랜드 할로미늄이 만든 이 옷은 설명서 없이 단추와 리본으로 각자 붙였다 떼었다 하며 입을 수 있다. 비트라니 큐레이터는 "호암미술관 안팎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전시를 설계했다"고 말했다.
최리아, 설치 전경,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제공
최리아, 설치 전경,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제공
이 전시의 유일한 비(非)아시아 작가인 프랑스 출신 이브라힘 메이테 시켈리(30)가 눈에 띈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다니던 그는 2024년 서울에 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회화를 배웠다. 아시아 대중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작품에는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같은 방에는 1980년대 뉴욕 뒷골목 사람들을 그린 중국계 미국 화가 마틴 웡(1946~1999)의 그림 석 점이 걸렸다.

대규모 작가 발굴전이 그렇듯 전시장은 혼란스럽다. '방이있고모든라디오가각기다른주파수를향하고있다' 라는 전시 제목부터 그렇다. 곽 실장은 "큐레이터가 정한 주제 하나로 억지스럽게 작가들의 작품을 묶어놓는 뻔한 방식을 탈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장 지도, 추천 동선, 오디오가이드가 없는 이유도 같다. 전 큐레이터는 "자유롭게 봐달라"고 말했다.
야마다 스즈코, 매달린 달, 사진 이정형, 호암미술관 제공
야마다 스즈코, 매달린 달, 사진 이정형, 호암미술관 제공
명화전을 선호하는 일반적인 관객에게는 어렵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다만 현대미술에 애정이 있고, 전시장을 산책하듯 여유있게 천천히 거닐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고 싶은 관객에게는 이만한 전시도 없다. 전시장만 해도 작품을 꼼꼼히 보려면 4~5시간이 걸리는 만큼, 미술관 앞 정원인 희원 관람 등을 포함해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기를 추천한다. 관람 통합권 2만5000원, 전시는 12월 27일까지.

성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