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제작된 까르띠에 탱크 워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를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직사각형 케이스와 양옆의 평행한 세로 프레임으로 차체와 궤도를 표현했다. / 출처. 까르띠에 홈페이지
1920년 제작된 까르띠에 탱크 워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를 위에서 내려다본 형태에서 영감을 받아, 직사각형 케이스와 양옆의 평행한 세로 프레임으로 차체와 궤도를 표현했다. / 출처. 까르띠에 홈페이지
모든 제품에는 이름이 있다. 화장품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 제품 개발 과정에서 제품명을 함께 고민한 적이 있다. 효능과 질감, 형태와 사용 방식, 고객에게 전하고 싶은 이미지, 브랜드가 지켜온 기준까지 몇 개의 단어 안에 담아야 했다. 그 짧은 이름을 정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판단이 필요했다. 이름은 제품에 담긴 기능과 이미지를 압축해 고객에게 전하는 첫 번째 언어이기 때문이다.

럭셔리에서도 모든 제품명이 아이콘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랑받은 제품의 이름은 처음의 뜻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름은 제품의 형태와 쓰임뿐 아니라, 그것을 사용한 사람과 제품이 태어난 시대까지 함께 불러낸다. 그래서 제품명은 브랜드가 제품에 붙인 첫 번째 해석이며, 고객이 그 제품을 기억하는 '가장 짧은 이야기'다.

형태와 쓰임을 담은 이름

익숙한 제품명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미처 보지 못했던 디자인의 출발점이 나타날 때가 있다. 전차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 빵을 드는 모습에서 이름을 얻은 가방, 지퍼의 구조를 하이주얼리로 옮긴 목걸이가 그렇다.

까르띠에(Cartier)의 탱크(Tank)는 형태가 이름이 된 시계다. 양옆으로 곧게 뻗은 선과 사각형의 비례, 장식보다 구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이다. 1917년 루이 까르띠에가 디자인한 탱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차에서 영감을 받았다. 케이스 양옆의 세로 프레임은 전차의 궤도를, 그 사이의 사각형 케이스는 차체를 연상시킨다.

탱크가 등장한 시기는 유럽의 미감이 아르누보의 유기적인 곡선에서 아르데코의 직선과 기하학적 질서로 이동하던 때이기도 했다. 군사용 기계의 형태가 손목 위의 시계로 옮겨지면서, 탱크라는 이름에는 기하학적 질서가 부상하던 시대의 미감도 함께 담겼다.
1997년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디자인한 펜디 바게트. 가로로 긴 작은 가방을 짧은 스트랩으로 팔 아래에 끼워 드는 모습이 프랑스 사람들이 바게트 빵을 드는 방식과 닮아 이름을 얻었다. / 출처. 펜디 홈페이지
1997년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디자인한 펜디 바게트. 가로로 긴 작은 가방을 짧은 스트랩으로 팔 아래에 끼워 드는 모습이 프랑스 사람들이 바게트 빵을 드는 방식과 닮아 이름을 얻었다. / 출처. 펜디 홈페이지
1997년 실비아 벤투리니 펜디가 디자인한 펜디(Fendi)의 바게트(Baguette)는 짧은 스트랩의 작은 가방을 팔 아래에 끼워 드는 형태였다. 프랑스 사람들이 바게트 빵을 같은 방식으로 드는 모습에서 이름을 얻었다. 제품을 드는 방식이 그대로 제품명이 된 것이다.

바게트가 등장한 1990년대 후반에는 미니멀리즘이 패션의 주요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바게트는 간결한 형태 위에 소재와 색, 장식을 끊임없이 변주하며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대비를 이루었다. 특정 가방이 한 시대의 패션을 대표하고, 여러 변주가 수집의 대상이 되는 세계적인 ‘잇백’의 흐름도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바게트는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펜디를 대표하는 가방으로 자리 잡았다. 친숙하고 간결한 이름도 이 가방을 드는 방식을 쉽게 기억하게 했다.
지퍼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지프 네크리스는 반클리프 아펠의 변형 가능한 주얼리를 대표한다. 지퍼를 열면 네크리스로, 닫으면 브레이슬릿으로 착용할 수 있다. / 출처. 반클리프 아펠 홈페이지
지퍼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지프 네크리스는 반클리프 아펠의 변형 가능한 주얼리를 대표한다. 지퍼를 열면 네크리스로, 닫으면 브레이슬릿으로 착용할 수 있다. / 출처. 반클리프 아펠 홈페이지
하이주얼리에도 당시 쿠튀르에서 새롭게 주목받던 기능적인 잠금장치에서 출발한 이름이 있다.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의 지프 네크리스(Zip Necklace)는 지퍼의 구조와 움직임을 주얼리로 옮긴 작품이다. 지퍼를 열면 V자형 네크리스로 펼쳐지고, 다시 잠근 뒤 뒤쪽 연결 부분을 분리하면 브레이슬릿으로 착용할 수 있다.

오늘날 지퍼는 일상적인 부속품이지만, 1930년대에는 기능복에서 쿠튀르로 들어오던 현대적인 잠금장치였다. 당시 전위적인 쿠튀리에 엘자 스키아파렐리는 지퍼를 옷 속에 감추지 않고 표면에 드러내 장식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윈저 공작부인 월리스 심프슨은 지퍼를 주얼리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반클리프 아펠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종은 1938년 장식용 지퍼 구조에 관한 특허를 등록했고, 오랜 개발 끝에 1950년 이를 지프 네크리스로 구현했다. 이듬해에는 네크리스에서 브레이슬릿으로 변형되는 구조까지 완성했다. 일상적인 잠금장치가 하이주얼리의 정교한 변형 기술로 발전한 것이다.

탱크라는 이름은 제품의 형태를, 바게트는 드는 방식을, 지프는 구조와 움직임을 기억하게 한다. 이 이름들은 제품의 디자인과 사용 방식을 가장 짧게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인물의 이미지를 얻은 이름

어떤 제품은 사람의 이름을 얻으며 새로운 성격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유명인의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이름이 제품에 한 인물의 이미지와 태도를 연결한다는 점이다. 대중이 기억하는 인물의 모습이 제품의 형태와 결합하면서, 제품에는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에르메스(Hermès)의 켈리(Kelly)와 버킨(Birkin)은 그 차이를 잘 보여준다. 두 가방 모두 여성의 이름을 얻었지만 켈리는 격식과 절제의 이미지로, 버킨은 실용성과 자유로운 태도로 기억된다.
1930년대 ‘삭 아 데페슈’에서 출발한 에르메스 켈리. 그레이스 켈리가 든 사진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 공식 제품명으로 자리 잡았다. / 출처. 에르메스 홈페이지
1930년대 ‘삭 아 데페슈’에서 출발한 에르메스 켈리. 그레이스 켈리가 든 사진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후 공식 제품명으로 자리 잡았다. / 출처. 에르메스 홈페이지
1956년,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에르메스 가방을 든 사진이 널리 퍼지면서, 그 가방은 그의 우아한 이미지와 함께 기억되기 시작했다. 사진 속 가방은 에르메스가 1930년대에 선보인 ‘삭 아 데페슈(Sac à dépêches)’였다. ‘문서를 담는 가방’이라는 뜻으로, 제품의 용도를 직접 설명하는 이름이었다. 이후 켈리라는 이름이 공식 제품명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레이스 켈리의 왕실 이미지와 절제된 우아함도 가방의 이름에 함께 남게 되었다.
제인 버킨과 장 루이 뒤마가 비행기에서 나눈 대화에서 출발해 1984년 탄생한 에르메스 버킨. 넉넉한 수납공간을 갖춘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와 크기, 디자인으로 변주되어 왔다. / 출처. 에르메스 홈페이지
제인 버킨과 장 루이 뒤마가 비행기에서 나눈 대화에서 출발해 1984년 탄생한 에르메스 버킨. 넉넉한 수납공간을 갖춘 기본 구조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와 크기, 디자인으로 변주되어 왔다. / 출처. 에르메스 홈페이지
버킨은 다른 배경에서 태어났다. 1984년 배우이자 가수인 제인 버킨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에르메스의 장 루이 뒤마를 만나 자신이 원하던 가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와 함께 이동할 때 필요한 물건을 넉넉히 담으면서도 편하게 들 수 있는 가방이었다. 장 루이 뒤마는 그 자리에서 넓은 수납공간을 갖춘 실용적인 가방을 스케치했다. 에르메스는 이 대화를 바탕으로 버킨백을 만들고 제인 버킨의 이름을 붙였다. 버킨이라는 이름에는 이동이 잦은 현대 여성의 실용적이고 자유로운 삶이 따라온다. 넉넉한 크기와 유연한 구조는 제인 버킨이 실제로 필요로 했던 가방의 조건이기도 했다.

켈리는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기존 가방이 새 이름을 얻은 경우이고, 버킨은 한 사람의 구체적인 요구를 들은 대화에서 새로운 가방과 이름이 함께 탄생한 경우다.
곡선형 실루엣과 피스톤 잠금장치가 특징인 구찌 재키 1961.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즐겨 든 모습이 알려지면서 ‘재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 출처. 구찌 홈페이지
곡선형 실루엣과 피스톤 잠금장치가 특징인 구찌 재키 1961.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즐겨 든 모습이 알려지면서 ‘재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 출처. 구찌 홈페이지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제품에 담긴 사례는 더 있다. 구찌(Gucci)의 재키(Jackie)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즐겨 든 가방으로 알려지며 20세기 스타일 아이콘의 이미지와 함께 기억되었다.
1995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선물된 뒤 그 이름을 기려 명명된 레이디 디올. 나폴레옹 3세 스타일 의자의 등나무 격자에서 유래한 칸나주 패턴과 ‘D.I.O.R.’ 참이 특징이다. / 출처. 라 갤러리 디올
1995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선물된 뒤 그 이름을 기려 명명된 레이디 디올. 나폴레옹 3세 스타일 의자의 등나무 격자에서 유래한 칸나주 패턴과 ‘D.I.O.R.’ 참이 특징이다. / 출처. 라 갤러리 디올
디올(Dior)의 레이디 디올(Lady Dior)은 1995년 파리를 방문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에게 선물된 가방이다. 이후 아르헨티나 방문을 비롯한 여러 공식 일정에서 그가 이 가방을 든 모습이 알려졌고, 다이애나를 기리는 레이디 디올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럭셔리 제품의 이미지는 매장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와 잡지, 왕실 행사와 파파라치 사진은 물론 레드카펫과 소셜미디어 속 유명인의 모습까지 제품을 기억하게 하는 장면이 된다. 유명인이 자주 사용한 제품에는 별칭이 붙고, 그 이름이 소비자 사이에서 빠르게 퍼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통용되는 별칭과 브랜드가 공식 제품명으로 받아들인 이름은 의미가 다르다.

한 인물과 연결된 이름이 공식 제품명으로 남으면, 제품은 그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인물이 보여준 이미지뿐 아니라 제품에 반영된 필요와 태도까지 브랜드의 유산으로 남는다. 제품이 그 이름으로 계속 불리는 동안, 그 인물이 상징한 태도와 그 시대의 생활 방식도 새로운 세대에 전해진다.

감정과 태도를 제안하는 이름

향수는 브랜드의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감각으로 확장하는 제품이다. 향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없기에, 이름은 향을 맡기 전부터 그 제품이 불러올 감정과 분위기를 상상하게 한다.
1999년 출시된 디올의 향수 ‘쟈도르’. 암포라를 닮은 보틀과 골드 네크라인은 향수 이름이 전하는 찬미와 화려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 출처. 라 갤러리 디올
1999년 출시된 디올의 향수 ‘쟈도르’. 암포라를 닮은 보틀과 골드 네크라인은 향수 이름이 전하는 찬미와 화려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 출처. 라 갤러리 디올
‘나는 사랑한다’ 또는 ‘나는 열렬히 좋아한다’는 뜻의 프랑스어 ‘J’adore’가 디올의 향수 이름이 되었다. 제품을 설명하는 대신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을 선택한 것이다. 쟈도르라는 이름은 특정 꽃이나 향료를 뜻하지 않는다. 사랑의 대상을 열어둔 채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고 찬미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행운과 기회를 뜻하는 이름을 담은 샤넬의 향수 ‘샹스’. 둥근 보틀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회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 출처. 샤넬 홈페이지
행운과 기회를 뜻하는 이름을 담은 샤넬의 향수 ‘샹스’. 둥근 보틀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기회의 이미지를 표현한다. / 출처. 샤넬 홈페이지
감정이나 삶의 태도를 제품명으로 삼은 향수는 자도르만이 아니다. 샤넬(Chanel)의 샹스(Chance)는 기회를, 입생로랑(Yves Saint Laurent)의 리브르(Libre)는 자유를, 랑콤(Lancôme)의 라비에벨(La Vie Est Belle)은 ‘인생은 아름답다’는 긍정의 문장을 이름으로 삼았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걸쳐 등장한 이 이름들에는 향수를 향기 그 자체를 넘어, 자신이 지향하는 이미지와 태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기회와 자유,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말은 향을 해석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지만, 같은 이름과 향도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삶의 방식에 따라 서로 다른 분위기로 드러난다. 이름이 향의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그것을 자신만의 표현으로 완성하는 것은 사용하는 사람이다.

형태와 쓰임, 인물과 감정에서 출발한 이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품이 태어난 시대의 감각을 전한다. 다만 좋은 이름만으로 제품이 오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제품이 계속 사용되고 새로운 세대에 의해 다시 해석되는 동안, 그 이름 아래에 경험과 기억이 축적된다. 오래 남는 제품명은 브랜드가 제품을 바라보는 방식과 고객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을 연결한다. 이름은 처음 붙지만, 그 의미는 시간 속에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