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팩트의 품격
책상 위에 서류가 수북이 쌓인다. 끊임없이 회의와 보고가 이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빼곡한 숫자와 복잡한 표, 수백 장의 문서와 색색의 도표들. ‘종이 없는 사무실’이란 소신도 당분간은 어쩔 도리가 없다. 국회에서 1년 중 가장 큰 무대가 펼쳐지는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공직자 시절, 30년가량 의회의 질문에 충실히 답변하려고 애썼다. 지금은 반대로 질문을 던지는 쪽에 서 있다. 자리는 달라졌지만, 변치 않는 점이 있다. 국민을 설득할 답변을 위해서는 120%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삶을 바꿀 만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끌어내려면 그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올해 국정감사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50조 원 넘게 손실을 봤다는 이른바 ‘삼전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상품부터 매매와 전월세가 모두 오르는 부동산 시장의 ‘트리플 상승’, 820조원이 넘는 초 팽창 예산과 162조원에 달하는 미래 대응 기금, 사상 처음으로 1500조원을 넘어설 국가부채까지. 어느 하나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사안이 가득하다.

이런 문제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대한민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과거 서류를 뒤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데이터와 팩트를 꼼꼼히 살핀다. OECD와 IMF, 월드뱅크 등 국제기구의 자료까지 샅샅이 뒤져본다. 팩트를 따라가면 질문이 나오고 대안이 나타난다.

물론 팩트만으로 완성도 높은 국정감사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수치를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해 현실과 연결 지어야 한다. 내가 속한 재정경제기획위원회는 수백억원부터 수십조원, 수백조원, 수천조원 단위의 일상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천문학적인 숫자를 다룬다. 미처 놓친 것은 없나 살펴보며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치열하게 파고들어야만 한다. 이는 팩트에 품격을 더하는 일이다.

최근 국정감사장의 풍경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날카로운 질의보다 호통이, 치밀한 논리보다 자극적인 한마디가 더 빨리 퍼져나가기도 한다. 국정감사장이 ‘쇼츠 제작소’가 된 것 같다는 지적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치열하게 연구하고 질의를 준비하는 수많은 의원과 보좌진의 열정이 깃들어 있다. 작은 사실 하나하나 확인하는 노력,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공정함, 틀린 사실을 인정하는 겸허함까지, 모두 팩트와 어우러진다.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파고들되, 더 낮은 자세로 살피고 대안까지 찾으려 고민을 거듭한다. 팩트의 조각이 서로 연결돼, 품격을 갖추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국정감사가 끝나면 수북이 쌓였던 서류들도 치워진다. 화제가 된 영상도 금세 잊힌다. 하지만 작지만 치밀한 팩트, 그것으로 시작한 질문과 정부의 대응, 결국 바로잡힌 제도는 오래도록 대한민국에 남는다. 다시 서류 뭉치를 집어 들고 첫 장을 넘긴다. 그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진실을 찾고 국민을 위한 품격을 더하기 위해 오늘도 밤을 지새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