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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신라 사람이 만들었다?…일본 사케의 비밀 [명욱 교수의 주류 인사이트]
연오랑·세오녀에서 이어지는
일본 신화 속 첫 사케 이야기
일본 신화 속 첫 사케 이야기
사케는 올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술이라고 볼 수 있다. 사케(酒)는 일본어로 그저 '술'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하지만 일본식 청주(淸酒)가 해외에 '사케'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면서, 이제는 일본술의 대명사가 되었다.
관세청 통계를 바탕으로 한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1~8월 일본에서 들여온 청주는 약 2,095만 달러어치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18.4% 늘었다. 일본은 수많은 한국인이 찾는 여행지이고, 오마카세 같은 고급 일식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급 사케도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기간 수입량이 1.7% 느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양은 거의 그대로인데 금액만 크게 뛰었다는 것은, 한국인이 더 비싼 사케를 찾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톤당 평균 수입 단가는 작년 5,000달러 남짓에서 올해 5,900달러 가까이로 16%가량 올랐다.
그렇다면 이 사케는 한국과 어떤 인연을 갖고 있을까? 일본에 술을 전한 한반도 사람으로 흔히 꼽히는 이는 둘이다. 하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백제인 수수코리(須須許理)이고, 다른 하나는 교토의 술의 신사 마쓰오타이샤(松尾大社)를 세운 신라계 도래 씨족 하타(秦) 가문이다. 이들은 단지 기술을 전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수수코리는 교토의 사가 신사(佐牙神社)에 술의 신으로 모셔져 있고, 하타 가문의 본거지에 있는 오사케 신사(大酒神社)에는 일족의 인물이 신으로 모셔져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일본에서 술의 신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앞선, 역사 이전 신화의 시대에도 이미 한반도와 술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공이 바다와 폭풍의 신 스사노오(素戔嗚)다.
신라를 거쳐 이즈모에 닿은 신, 스사노오
일본 신화에서 세상을 만든 신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다. 이자나기가 몸을 씻을 때 세 명의 귀한 신(三貴子)이 태어났다.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 달의 신, 그리고 막내 스사노오다. 스사노오는 누나 아마테라스와의 오해가 겹치면서 결국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을 떠나 땅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출에는 험한 난관이 가로막고 있는 법이다. 이즈모에 도착한 그를 기다린 것은 머리와 꼬리가 여덟 개씩 달린 거대한 뱀,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였다. 그 땅을 다스리던 토착 신(國神) 부부는 해마다 딸을 하나씩 이 괴물에게 바쳐 왔고, 마지막 남은 딸 쿠시나다히메(奇稻田姬)마저 제물이 될 처지였다.
스사노오는 이 부부에게 독특한 주문을 한다. 여러 번 거듭 빚은 독한 술을 만들어 여덟 개의 통에 담아 두라는 것이었다. 술 냄새에 이끌린 오로치는 여덟 개의 머리를 각각 통에 박고 술을 들이켰고, 취해 곯아떨어졌다. 그 틈에 스사노오는 칼을 뽑아 괴물을 베었다. 『일본서기』에 함께 전하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이 칼을 '한(韓)의 쇠 칼(韓鋤之劍)'이라고 적은 것도 있다. 신화 속 첫 승리의 장면에 한반도의 철이 등장하는 셈이다.
여러 번 빚은 술로 괴물을 무너뜨리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칼만이 아니다. 괴물을 쓰러뜨린 그 술의 정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 술을 '여덟 번 빚은 술(八鹽折之酒, 八醞酒)'이라 적는다. 술을 한 번 빚고 끝내지 않고, 밑술에 다시 쌀과 누룩을 더해 덧술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많은 쌀이 들어가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고 맛이 깊어진다. 우리 전통주에서는 이를 중양법(重釀法)이라 부르며, 세 번 빚은 삼양주(三釀酒)나 다섯 번 빚은 오양주(五釀酒)가 대표적이다.중양법은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다. 오랜 발효 동안 효모를 건강하게 관리해야 하고, 누룩이라는 발효제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일본 신화에서 '여덟(八)'은 '많다'는 뜻으로 즐겨 쓰이는 숫자이니, 실제로 여덟 번을 빚었다기보다 '여러 번 거듭 빚은 귀한 술'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신라를 거쳐 온 신이 한반도의 쇠 칼과 함께 고도의 양조 기술로 빚은 술을 들고 등장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앞선 기술을 지닌 집단이 바다를 건너와 새 땅에 자리 잡는 과정이 신화로 남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에서는 머리가 여덟 개 달린 이 괴물을 이즈모를 흐르는 강과 그 지류로 보기도 한다. 해마다 범람하는 강을 다스린 치수(治水)의 공적이 괴물 퇴치 이야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강 상류는 예로부터 사철(砂鐵)을 이용한 제철로 이름난 곳이라, 오로치 이야기를 제철 집단의 등장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강을 다스리고, 철을 다루고, 남다른 술을 빚는 기술이 한 신의 이야기 속에 겹쳐 있는 셈이다.
연오랑·세오녀와 이어지는 이야기
이 설화를 스사노오와 이어 보는 시각은 일찍부터 있었다. 사학자 이홍직(李弘稙)은 동해를 건너 일본 한 지방의 지배자가 된 연오랑이야말로 일본 신화의 스사노오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보았다.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이즈모 일대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의 뼈대가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결은 시마네 현지에서도 낯설지 않다. 시마네현 마스다(益田)시의 전직 초등학교 교장 니시코리 아키라는 연오랑·세오녀와 스사노오의 이야기를 함께 엮어 『바다를 건넌 신(海を渡った神様)』이라는 동화책을 펴내기도 했다. 연오랑·세오녀가 살던 포항 영일(迎日)의 옛 이름 근오지(斤烏支)가, 시마네현 앞바다의 섬 오키(隱岐)라는 이름으로 옮겨 갔다는 연구도 있다.
이즈모에 남은 한반도의 흔적
스사노오가 괴물 오로치를 물리치고 이즈모 토착 세력의 딸 쿠시나다히메와 함께 자리 잡은 이즈모는 지금도 일본 신화의 고향으로 불린다. 이곳의 이즈모 대사(出雲大社)는 스사노오의 후손 신을 모신 곳으로, 본전 뒤편에는 스사노오를 모신 작은 신사가 따로 있다. 일본에서는 음력 10월을 '신이 없는 달(神無月)'이라 부른다. 전국의 신들이 모두 이즈모로 모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즈모에서만은 이 달을 '신이 있는 달(神在月)'이라 부른다.
스사노오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그가 머물던 하늘나라 고천원이 대가야의 도읍 고령이라는 주장이 있어, 고령에는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 비석까지 서 있다. 그가 내려왔다는 소시모리가 우리말 '소머리', 즉 우두(牛頭)를 옮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모두 학계의 정설은 아니지만, 그만큼 스사노오라는 신이 한반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상상되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 신화 속 첫 술은 한반도와 얽혀 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술 빚는 법을 백제 사람에게 배웠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일본에서 술의 신이 되었다. 그 술이 바다를 건너 지금 우리 식탁에 다시 오르고 있다. 그런데 신라에서 건너온 신이 처음 닿은 땅 시마네는 오늘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의 신화가 전하는 바다 건너 교류의 기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