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메종 보고시안 주목한 韓아름다움
신라 금관에서 영감받은 하이 주얼리
비취와 옐로 다이아로 왕실 미학 펼쳐내
K컬처의 열기 속 조명받는 한국 헤리티지
‘신라의 선덕여왕(Queen Seondeok of Silla)’ 더블 커프스를 모델이 착용한 모습 / 출처. 보고시안
하이 주얼리의 세계는 역사와 문화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어 왔다. 하이 주얼러의 시선이 이번에는 신라의 선덕여왕에게 닿았다. 스위스 하이 주얼리 메종 보고시안(Boghossian)이 동서양의 여왕 11명을 조명하는 ‘퀸즈 오브 타임(Queens of Time)’ 컬렉션에 선덕여왕을 작품으로 담은 것이다. K-컬처가 세계로 뻗어 나가는 지금, 한국의 오랜 역사와 미학이 글로벌 하이 주얼리 메종의 창작 소재로 조명되고 있어 눈길이 간다.
보고시안은 제네바에 본사를 둔, 1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가족 경영의 하이 주얼리 메종이다. 1868년 오바네스 보고시안이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던 실크로드의 중심지에 설립했다.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는 환경에서 시작된 가문의 역사와 대대로 쌓아온 보석에 대한 안목을 바탕으로, 동양의 풍부한 색채와 장식미에 스위스의 정교한 세공 기술을 접목해 왔다.
CEO 알버트 보고시안(Albert Boghossian)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드먼드 친(Edmond Chin)이 함께 이끈 이번 컬렉션의 출시는 2년이 넘는 작품 개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여왕들의 삶과 유산을 보석으로 풀어낸 작품들 가운데, 7세기 신라를 다스린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어떤 주얼리로 되살아났을까.
보고시안 '퀸즈 오브 타임' 컬렉션
‘퀸즈 오브 타임’ 컬렉션. (왼쪽부터)‘신라의 선덕여왕(Seondeok of Silla)’,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 ‘캐서린 더 그레이트(Catherine the Great)’,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 / 출처. 보고시안
‘퀸즈 오브 타임’은 11명 여왕의 고유한 스타일을 14개의 세트, 총 39점의 하이 주얼리로 풀어냈다. 고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부터 비잔틴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 프랑스의 조세핀 황후까지 시대를 움직인 여성들이 선정됐다. 여기에 신라의 선덕여왕을 비롯해 페르시아의 아토사,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 크메르 제국의 인드라데비, 무굴제국의 뭄타즈 마할 등 아시아의 여왕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선덕여왕을 표현한 모티브는 바로 신라 금관이었다. 한국 고대 왕실의 미학을 보여주는 창작의 원천으로 신라 금관이 자리한 것이다.
비취와 옐로 다이아몬드로 피어난 선덕여왕의 위엄
‘신라의 선덕여왕’ 이어링 / 출처. 보고시안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국왕이자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군주다. 보고시안은 천문과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여왕의 삶과 함께, 신라 금관의 조형과 상징에 주목했다. 위로 뻗은 나뭇가지와 사슴뿔 형태의 장식과 그 사이로 매달린 금제 원판과 초록색 곡옥(曲玉)이 영감의 출발점이다. 메종은 금관의 형상을 생명의 나무이자 하늘과 지상을 잇는 상징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를 두 손목에 착용하는 더블 커프스(팔찌)로 재해석했다.
[좌측부터] 신라 금관, ‘신라의 선덕여왕’ 하이 주얼리 / 출처. 보고시안
작품의 중심 소재는 비취로 불리는 최상급 경옥(硬玉, Jadeite)이다. 가지 형태로 조각한 경옥이 각 커프스 중앙의 물방울 모양의 카보숑을 향해 모이고, 그 주위로 팬시 비비드 옐로 다이아몬드가 빛을 더한다. 경옥의 매끄러운 광택과 옐로 다이아몬드의 선명한 반짝임은 신라 금관의 색채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낸다. 함께 구성된 종 모양의 이어링에는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옐로 페어 드롭 장식이 달려 있다. 금관에 늘어진 드리개의 리듬을 연상시키는 장식이다. 머리 위에 세워졌던 금관의 조형이 손목과 귀를 장식하는 주얼리로 옮겨지면서, 신라 왕실의 유산이 오늘날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었다.
진주와 튜더 로즈로 되살아난 엘리자베스 1세
[좌측부터] '엘리자베스 1세’ 소투아르, ‘엘리자베스 1세’ 이어링 / 출처. 보고시안
선덕여왕의 이야기가 신라 금관의 조형과 비취로 펼쳐졌다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초상화 속 진주와 화려한 궁정 복식의 색채로 되살아났다. 여왕의 초상화에서 진주는 드레스와 머리 장식을 수놓으며 왕실의 위엄을 드러낸다. 보고시안은 여왕을 위해 두 가지 세트를 선보였다. 첫 번째는 천연 콘크 진주를 중심으로 산호와 스피넬 비즈가 얽히고 루비와 앤티크 골드 비즈가 어우러진 긴 목걸이인 ‘소투아르’다. 여러 소재가 겹겹이 어우러지는 구성은 초상화 속 여왕의 복식이 보여주는 풍부한 색채와 장식미를 떠올리게 한다.
[좌측부터] 니콜라스 힐리어드가 그린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엘리자베스 1세’ 하이 주얼리 / 출처. 보고시안
두 번째 작품에는 아게이트에 조각한 왕가의 상징 ‘튜더 로즈’가 선명한 초록색 차보라이트와 회녹색의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87개의 진주와 만난다. 여기에 오렌지 다이아몬드와 천연 해수 진주가 더해져 당시 복식과 직물의 풍성한 색채와 질감을 떠올리게 한다. 신라 금관과 영국 왕실의 장미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에서 탄생했지만, 이번 컬렉션에서 나란히 놓인다.
모거나이트와 장밋빛으로 피어난 조세핀 황후
‘조세핀 황후’ 목걸이 / 출처. 보고시안
나폴레옹 1세의 아내인 프랑스의 조세핀 황후를 위한 작품에서는 부드러운 분홍색과 구조적인 선이 어우러졌다. 보고시안은 티아라와 카메오 장신구, 진주를 즐겼던 조세핀의 세련된 취향을 모거나이트로 조각한 앙상블에 담았다.
[좌측부터] 프랑수아 제라르가 그린 ‘조세핀 황후 초상화’, ‘조세핀 황후’ 하이 주얼리 / 출처. 보고시안
여기에 선셋 투어멀린과 임페리얼 토파즈를 더해 은은한 장밋빛을 펼쳐냈다. 조세핀이 어린 시절 사용했던 이름 ‘로즈(Rose)’를 환기하는 보석의 색채였다. 황후의 제정 양식에서 가져온 건축적인 선과 나폴레옹의 편지에 담긴 낭만적 정서를 동시에 반영했다. 서로 다른 보석이 이루는 섬세한 색의 변화는 분홍색에 깊이와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렇게 부드러운 색감과 질서 있는 선의 대비가 황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장밋빛 보석과 대담한 구조 속에 조세핀 황후의 우아함과 강인함을 함께 담아낸 것이다.
러시아 겨울의 빛으로 그려낸 예카테리나 대제
‘캐서린 더 그레이트’ 목걸이 / 출처. 보고시안
‘캐서린 더 그레이트(Catherine the Great)’로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는 18세기 러시아를 34년간 통치한 여제로, 예술을 후원하고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품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보고시안은 그를 위한 작품을 러시아 겨울의 차가운 반짝임을 담은 ‘화이트 온 화이트’로 해석했다. 영감의 출발점은 여제가 주문한 리본 매듭 형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좌] ‘캐서린 더 그레이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우] ‘캐서린 더 그레이트’ 하이 주얼리 / 출처. 보고시안
여제의 목걸이를 추상적이고 비대칭적인 구성으로 풀어내고, 패싯(Facet, 연마한 보석의 면)을 낸 육각형 문스톤에 날렵한 연 모양의 다이아몬드를 새겨 넣는 기법으로 결합했다. 여기에 천연 해수 진주와 육각형 다이아몬드가 화려함을 더한다. 예카테리나의 작품은 화이트 톤 안에서 달라지는 투명도와 광택으로 제국의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에드먼드 친의 예술적 안목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더블 리비에르. 2020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에메랄드 목걸이 사상 최고가를 경신한 작품이다 / 출처. 보고시안 홈페이지
시대와 문화권이 다른 여왕들의 유산을 주얼리로 풀어낸 배경에는 보고시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드먼드 친의 경험과 안목이 있다. 싱가포르 출신으로 홍콩을 거점으로 활동해 온 그는 크리스티에서 주얼리 부문을 이끌었다. 이후 자신의 아틀리에 ‘에트세트라(Etcetera)’를 설립해 희귀한 보석과 독창적인 세팅을 결합한 주얼리를 선보였다. 보고시안과 10년 넘게 협업한 끝에 2015년 메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했다.
그가 보고시안을 위해 디자인한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 더블 리비에르는 2020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약 700만 미국달러(약 77억원)에 낙찰되며 무오일 에메랄드 목걸이의 당시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알버트 보고시안이 4년에 걸쳐 선별한 천연 무오일 에메랄드 28개, 총 117.6캐럿을 중심으로 다이아몬드 59.40캐럿과 비취를 함께 세팅한 작품이다. 에메랄드와 비취라는 서로 다른 초록 보석을 조합한 이 작품에서 그의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비취는 ‘퀸즈 오브 타임’의 선덕여왕 피스에서도 신라 금관을 새롭게 해석하는 중심 소재가 됐다.
K-컬처가 세계인의 일상과 취향을 바꾸고 있는 지금, 한국의 오랜 역사와 미학이 새로운 창작의 원천으로 조명받은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더욱이 엘리자베스 1세, 조세핀 황후, 예카테리나 대제와 같은 반열에 선덕여왕이 올랐으니 더욱 그렇다. 그 속에서 신라 금관의 황금과 곡옥이 세계적인 메종의 시선을 만나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펼쳐졌다는 사실은 의미가 각별하다. K-팝, 드라마, 영화로 시작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이제는 우리의 역사와 미학을 향하고 있다. 우리의 보석함 안에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