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슨 청소기로 유명한 영국의 제임스 다이슨은 ‘실패의 발명가’다. 1978년부터 5년간 5126번 실패한 뒤 5127번째 시도 끝에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를 개발했다. 헤어드라이어를 개발할 때도 599번 실패했다. 다이슨은 “실패를 즐기고 실패에서 배워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글은 실패 기록을 모아둔 ‘구글 무덤(Google Graveyard)’을 통해 시행착오 경험을 공유한다. 핀란드는 10월 13일을 ‘세계 실패의 날’로 정하고 대형 행사를 연다. 실패를 다음 도전의 출발점으로 삼기 위해서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한국은 실패에 관대하지 않다. 12일 한국경제신문과 대한상공회의소가 20·30대 창업 경험자 686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응답자 10명 중 6명이 창업 실패 경험이 취업이나 사회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응답했다. 8.6%가 ‘매우 그렇다’고 했고 49.9%가 ‘그런 편’이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실패 경험은 무능함의 주홍글씨로 작용해 다음 도전을 막는 걸림돌이 된다. 네덜란드 경영학자 헤이르트 호프스테더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의 정도를 수치화한 불확실성회피지수(UAI) 기준으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UAI가 85로 미국(46) 영국(35) 덴마크(23)보다 두세 배 이상 불확실한 도전을 꺼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신생 스타 기업의 탄생을 가로막는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1세대 창업자가 현직에 있는 젊은 기업은 4곳에 불과하다. 미국은 50대 기업 중 13곳의 창업자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 두 번째 도전이 불가능한 이유로 창업 경험자들은 ‘경제적 부담’(33.6%)과 ‘재취업의 어려움’(27.0%)을 가장 많이 꼽았다. 창업과 재취업의 천국으로 불리는 덴마크는 좋은 참고 사례다. 고용유연성에 탄탄한 사회안전망을 결합해 실패의 두려움을 줄여준다.
에스벤 크로그니콜라이센 덴마크 노동시장채용청 과장은 “인력이 부족한 분야에 직업교육 재원을 집중해 재취업 성과로 이어지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한 사회의 품격은 모든 구성원이 잘 달리느냐가 아니라 넘어진 누군가를 일으켜줄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의 품격, 두 번째 주제로 재도전이 가능한 사회를 정한 이유다.
창업 독려하지만 '성공'에만 박수…폐업 출구전략은 각자가 알아서 재기 지원 프로그램도 '바늘구멍'…우린 왜 실패가 스펙인 제도 없나
“30대 초반에 희망퇴직을 하고 야심 차게 라이프스타일 용품 판매를 시작했지만 1인 창업가여서 투자받는 데 한계가 있었죠. 결국 사기를 당해 사업을 접었지만 아직도 창업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도전하는 게 점점 두려워지네요.”(서울 거주 이모씨)
한국에서 창업 실패의 비용은 단순히 경제적 손해로 끝나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 채무와 신용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혹독한 대가는 한 번 폐업하면 실패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 것이다. 취업 시장에서도 한 번 밀려나면 다시 진입하기 어려워 구직을 포기하거나 경제활동을 중단하는 ‘쉬었음’ 청년이 늘고 있다. 한 번의 실패가 장기간의 경제활동 중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재도전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실패 과정에서 쌓은 경험을 다시 경제활동에 활용할 수 있는 사회를 조성하는 것이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필요한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패 경험자 58% “사회생활에 악영향”
한국경제신문과 대한상공회의소가 20·30대 창업 경험자(686명)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창업 실패 경험이 향후 취업이나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58.5%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35.8%였다.
창업 실패 시 가장 힘든 점으로는 33.6%(복수 응답)가 ‘빚·대출 등 경제적 부담’을 꼽았다. ‘경력 단절 등에 따른 재취업 어려움’(27.0%)이란 답변이 두 번째로 많았다. 주변의 시선과 심리적 부담(15.9%), 법률·파산·개인회생 등 복잡한 절차(12.9%)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창업 실패가 빚의 굴레로 이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회생법원에 따르면 2025년 개인회생 사건 가운데 20·30대 비중은 38.4%였다. 개인 회생자 열 명 중 네 명이 청년이라는 의미다.
‘실패 비용’을 낮추는 것은 복지 차원을 넘어 경제의 역동성을 높일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3년 한국 혁신정책 보고서에서 한국이 혁신 선도국으로 도약하려면 창의성과 기업가정신뿐 아니라 ‘위험 수용성(risk acceptance)’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실패 가능성을 성공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68만 명에 달하는 쉬었음 청년을 양산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비경제활동 인구 중 별다른 이유 없이 구직 활동과 취업 준비, 교육·훈련 등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쉬고 있는 이들이다. 한국경제인협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쉬었음 청년의 은둔 확률은 17.8%로 취업 청년(2.7%)의 6.6배에 달했다. ‘실직 초기’ 청년의 은둔 확률(15.2%)도 상대적으로 높았다.
정부 창업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30대 서모씨는 “사업을 정리하고 싶어도 지원사업 협약 때문에 마음대로 폐업하기 어려웠다”며 “두 번째 도전은커녕 첫 번째 실패를 정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지원 제도 활용은 10% 그쳐
창업 경험자가 재기를 위해 최우선으로 바라는 지원 형태는 ‘대출 상환·채무조정 등 금융지원’(34.0%)이란 답이 가장 많았다. ‘재취업·직업훈련’ 지원(21.5%)과 ‘법률·세무 상담 및 절차 지원’(21.5%), 재창업 자금 및 투자 지원(19.4%)이 뒤를 이었다.
정부도 재도전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소상공인의 폐업과 재기를 지원하는 희망리턴패키지 예산을 지난해 2450억원에서 올해 3056억원으로 늘린 데 이어 내년 예산안에선 3153억원으로 확대 편성했다.
정작 지원 대상자가 이런 예산을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조사에서 정부·공공기관의 재기 지원제도를 이용해봤다는 응답은 10.6%에 그쳤다. 지원 요건이 까다롭고(30.9%), 신청 절차가 복잡하다(29.3%)는 게 주요 걸림돌로 꼽혔다.
폐업 이후 필요한 지원으로는 채무조정뿐 아니라 재취업·직업훈련, 심리상담까지 다양했다. 실패 경험자의 복귀 경로는 재창업에만 국한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사업에 실패하면 다시 회사원이 될 수 있고, 직장에서 퇴직한 중장년은 새로운 직업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경력 단절자가 다시 노동시장에 들어오는 것도 중요하다. 실패한 사람에게 동일한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쌓은 경험을 다음 일자리와 사업에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백지훈 대한상공회의소 플랫폼운영팀장은 “창업에 실패하더라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창업하고 싶다는 청년이 절반을 넘는다는 점은 고무적”이라며 “청년의 재도전 의지가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