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브 스텐베크는 12년간 육아를 전담하다가 올해 9월 12년 만에 보험회사에 재취업했다.  정영효 기자
야코브 스텐베크는 12년간 육아를 전담하다가 올해 9월 12년 만에 보험회사에 재취업했다. 정영효 기자
지난 4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야코브 스텐베크(45)는 지난달 보험회사에 재취업했다. 아내의 근무지인 스위스, 브라질, 일본에서 세 딸의 육아를 전담한 지 12년 만이다. 유럽에서 가장 유연한 고용 제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파울 프레데리크 하슬뢰우는 20년간 덴마크 공영방송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뒤 지난 1년 반 동안에만 5~6곳의 직장을 옮겨다녔다. 정영효 기자
파울 프레데리크 하슬뢰우는 20년간 덴마크 공영방송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뒤 지난 1년 반 동안에만 5~6곳의 직장을 옮겨다녔다. 정영효 기자
파울 프레데리크 하슬뢰우(54)는 20년간 근무한 덴마크 공영방송에서 해고된 뒤에도 경력단절을 피하고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5~6곳의 회사를 거쳤다. 6개월짜리 계약직이 끝난 이달 2일 다시 실업자가 됐지만 일자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오는 19일부터 2개월간 계약직으로 일한 뒤 크리스마스 이후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계획이다. 그는 “직전 소득의 최대 90%까지 보장하는 실업보험기금(A-kasse)이 있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

덴마크인은 대부분 이직과 재취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스텐베크는 “덴마크인이라면 ‘나 직장 옮겼어’라거나 ‘지금 다니는 회사가 여섯 번째 직장이야’라는 친구의 말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덴마크는 유럽에서 해고가 가장 쉬운 나라다. 그 대신 유럽 최대 수준의 실업급여와 안정적인 재취업을 보장한다. 높은 고용유연성(flexbility)과 탄탄한 사회안전망(social security)을 결합한 덴마크의 노동시장 정책을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라고 부르는 이유다.

기업은 쉬운 해고 덕분에 경기 변동과 산업 구조 변화에 맞춰 인력을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다. 근로자는 실업보험기금이 지급하는 실업급여로 생계를 유지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1년 연례협의 보고서에서 “기업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복지와 노동시장 제도가 흡수해주기 때문에 구조조정이 상대적으로 빠르다”고 분석했다. 2023~202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서 덴마크는 산업 간 직원 재배치로 생산성을 1.6%포인트 높였다.

탄력적인 인력 재배치 덕분에 덴마크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106.5달러(2024년 기준)로 OECD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57.5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덴마크는 낙농강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덴마크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GDP의 62.7%가 서비스업, 24.8%가 제조업에서 나온다. 지난해 덴마크 GDP 중 상품·서비스 수출 비중은 70.1%로 한국(45.8%)보다 높다. 한국보다 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 것이다.

인구가 60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는 내수시장에 의존하지 않았다. 세계를 상대로 고부가가치 상품을 팔아 살아남았다. 이를 위해 산업 구조를 ‘세계 시장에서 1~3위를 유지하는 고부가가치 전문기업군’ 중심으로 재편했다. 당뇨·비만 치료제 전문 제약사 노보노디스크, 세계 1위 해운업체 머스크, 풍력터빈 강자 베스타드, 장난감 블록으로 유명한 레고 등이 대표적이다.

재도전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다 보니 덴마크는 유럽의 대표적인 ‘창업왕국’으로도 꼽힌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유럽 스타트업·스케일업 스코어보드’에 따르면 2025년 기준으로 덴마크 인구 100만 명당 스타트업은 723개로 EU 회원국 중 6위다. 스타트업이 급성장하는 단계에 들어서는 스케일업은 20개로 3위를 차지했다.

“두터운 권리와 강한 의무의 결합”

덴마크가 해고를 쉽게 한다고 해서 근로자 보호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사무관리직 수습사원은 14일, 6개월~2년9개월 근속 근로자는 3개월, 9년차 직원부터는 6개월 전 서면으로 해고를 미리 알려야 한다. 대신 실직자에게도 엄격한 의무를 적용한다. 실직 당일 덴마크 정부의 공식 구직 포털인 ‘잡넷’에 구직자 등록을 해야 실업급여가 나온다.

1주일에 세 곳씩 일자리에 지원한 뒤 채용 통보를 받으면 바로 다음날 출근해 주당 37시간 근무해야 한다. 이 모든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실업급여가 중단된다.

엠마 메르텐스 크리스텐센(27)은 지난해 1월 대학을 졸업한 뒤 두 번째 직장에서 방송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닌 만큼 덴마크에 사는 것이 굉장히 큰 행운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코펜하겐=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