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에 '데스데모나' 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손지혜 / 클래식 부산 제공.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에 '데스데모나' 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손지혜 / 클래식 부산 제공.
"프레가 페르 노이(Prega per noi·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데스데모나의 기도가 흐르자 지휘자 정명훈도 눈을 감았다. 소프라노 손지혜가 부르는 '아베 마리아'에 깊이 잠긴 듯 그의 손이 음악과 함께 움직였다. 남편의 의심 앞에서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는 여인의 마지막 기도. 부산콘서트홀에서 만난 베르디의 '오텔로'는 이 장면에서 가장 깊은 비극을 선사했다.

지난 10~11일 부산콘서트홀 무대에 오른 콘서트오페라 '오텔로'는 성악가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인물의 내면을 그려낸 공연이었다. 정명훈이 지휘하고 표현진이 연출, 김현정이 무대디자인을 맡았다. APO(아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클래식부산합창단, 노이오페라코러스, 해운대구립소년소녀합창단이 참여했다.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 무대 / 클래식 부산 제공.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 무대 / 클래식 부산 제공.
김현정이 디자인한 계단 무대는 표현진의 연출을 만나 여러 얼굴을 드러냈다. 표현진은 출연진의 동선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같은 계단을 때로는 섬뜩한 등장을 위한 통로로, 때로는 오해를 키우는 공간으로, 때로는 살인을 모의하는 장소로 활용했다. 인물들이 어디에 서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계단의 극적 의미도 달라졌다.

합창석에 앉은 합창단을 극의 일부로 활용한 점도 참신했다. 표현진은 여러 장면에서 합창단에게 연기를 부여해 합창석까지 극적 공간으로 확장했다. 계단 위 출연진의 동선과 합창단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콘서트홀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활용했다.

이날 가창과 극적 표현이 가장 빈틈 없었던 주역은 데스데모나 역의 소프라노 손지혜였다. 특히 4막 '버드나무의 노래'와 '아베 마리아'는 공연 전체의 무게중심을 그의 목소리로 옮겨놓았다. 죽음을 앞둔 인물의 불안과 슬픔이 노래 안에 응축됐다. 앞선 장면들에서 쌓인 의심과 격정은 이 대목에 이르러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으로 다가왔다.

공연이 끝난 뒤 한 관객은 "라 스칼라의 차기 음악감독인 정명훈이 손지혜를 그 무대에 데려가는 것 아니냐"며 기대를 나타냈다. 이날 손지혜가 남긴 인상을 짐작하게 하는 반응이었다.
(왼쪽부터) '이아고' 역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와  '오텔로' 역 테너 그레고리 쿤데 / 클래식 부산 제공.
(왼쪽부터) '이아고' 역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와 '오텔로' 역 테너 그레고리 쿤데 / 클래식 부산 제공.
타이틀롤 오텔로 역을 맡은 미국 테너 그레고리 쿤데의 첫 소리에서는 세월이 묻어나는 음색에 우려가 앞섰다. 하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탄탄한 호흡과 안정적인 발성이 신뢰를 줬다. 그는 발성적 부담이 큰 드라마틱한 배역을 음 이탈 없이 끝까지 소화했다. 목소리의 젊음과 배역을 감당하는 역량은 별개임을 보여준 무대였다. 쿤데는 1954년생으로 올해 72세다.

벨칸토 레퍼토리로 명성을 쌓은 쿤데는 이후 베르디의 극적인 배역으로 영역을 넓혔다. 2012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텔로를 처음 맡은 뒤 자신의 대표 배역으로 만들었다. 로시니와 베르디의 '오텔로'를 같은 시즌에 소화한 이력도 있다. 정명훈과는 라 페니체와 베네치아 두칼레궁 야외 무대 등에서 이 작품으로 호흡을 맞췄다. 이번에도 작품에 대한 두 음악가의 오랜 경험이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이어졌다.
'이아고' 역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가 색이 나뉜 의상을 입고 쓰러진 '오텔로' 앞에서 환호하는 장면  / 클래식 부산 제공.
'이아고' 역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가 색이 나뉜 의상을 입고 쓰러진 '오텔로' 앞에서 환호하는 장면 / 클래식 부산 제공.
이아고 역의 세르비아 출신 바리톤 젤리코 루치치는 처음부터 위압적인 악인의 목소리를 앞세우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음색으로 접근해 극이 진행될수록 인물의 위험성을 드러냈다. 좌우의 색을 달리한 의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속내가 다른 이아고의 두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접근은 이 작품을 확증편향의 비극으로 읽게 했다. 이아고는 실제 일어난 일 사이에 의심을 끼워 넣고, 오텔로가 스스로 잘못된 결론에 이르도록 유도한다. 루치치의 부드러운 음색은 그 계략에 설득력을 더했다. 오텔로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수록 이아고의 존재는 더욱 무서워졌다.

아쉬운 대목도 있었다. 성악진의 호흡이 끝까지 고르게 맞아떨어지 못했다. 3막 후반 대규모 중창에서 아쉬움이 드러났다. 오텔로와 이아고가 자리한 쪽의 반대편에서 로데리고 역의 테너 김재일, 로도비코 역의 베이스 김철준, 카시오 역의 테너 황준호, 에밀리아 역의 사비나 킴이 함께 부르는 대목은 매끄럽지 못했다. 네 사람의 앙상블이 충분히 맞물리지 않으면서 극에 대한 몰입이 잠시 흐트러졌다.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의 3막 장면 / 클래식 부산 제공.
부산콘서트홀에서 열린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의 3막 장면 / 클래식 부산 제공.
그러나 성악가들의 어긋난 호흡 변수 속에서도 공연 전체를 매끄럽게 이끈 것은 정명훈의 음악이였다. 오텔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떠올리게 하는 관현악의 극적 역할과 반복 동기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베르디 후기의 걸작이다. 1막의 사랑을 4막의 비극 속에 되살리는 ‘입맞춤의 동기’처럼, 관현악은 인물이 말하지 않는 감정과 기억까지 들려준다. 정명훈과 APO는 이러한 관현악의 표현력을 살려 사랑의 서정부터 파국의 냉기까지 그려냈다.

첼로의 심준호는 솔로가 등장할 때마다 섬세한 표현으로 음악의 결을 살렸다. 전반부에서 귀를 붙든 하피스트 윤혜순의 연주도 오케스트라의 색채를 풍성하게 했다. 개별 연주자의 존재감이 극의 흐름 안에서 빛났다.

현악진의 역량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4막이었다. 바이올린들이 데스데모나의 감정을 그려낸 데 이어, 더블베이스가 오텔로의 섬뜩한 등장을 알렸다. 이창형이 이끈 더블베이스 파트는 풍부한 배음을 실은 저음으로 공기를 바꿨다. 그 울림에는 뼛속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냉기가 있었다. 손지혜의 기도가 전한 슬픔과 저음 현악기가 예고한 폭력이 맞닿으며 비극은 완성됐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정명훈이 관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했고,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출연진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커튼콜은 10분 동안 이어졌다.
정명훈이 지휘한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에 출연한 '데스데모나' 역 손지혜와 '오텔로' 역 그레고리 쿤데  / 클래식 부산 제공.
정명훈이 지휘한 콘서트 오페라 '오텔로'에 출연한 '데스데모나' 역 손지혜와 '오텔로' 역 그레고리 쿤데 / 클래식 부산 제공.
이번 무대는 부산에서 오페라를 만들어갈 연주 역량을 가늠하게 했다. 국제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주역들과 국내 연주자, 지역 성악가와 합창단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났다. 공연이 남긴 음악적 성과를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가 부산의 과제다.

부산시는 내년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을 위한 라 스칼라 초청 공연의 추진 여부를 10월 중 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재수 부산시장은 이날 공연장을 찾지 않았다.

부산=조동균 기자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