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중문화 시장을 주도하는 한류의 본고장 한국에 일본 음악과 애니메이션 등 ‘J컬처’가 거세게 밀려들고 있다.
9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과 업계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 일본 아티스트가 국내에서 연 공연은 143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76건)의 2배에 육박하고, 2년 전(34건)과 비교하면 4.2배에 달한다. 세계 정상급 스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1만 석 이상 대형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연 일본 아티스트도 기무라 다쿠야 등 9팀으로 집계됐다.
온라인에서도 J팝이 강세다. 올해 한국 유튜브 뮤직의 주간 인기곡 차트에서 ‘톱100’에 진입한 일본 음원만 14곡이 넘는다. 극장가에서는 일본 만화영화 ‘치이카와’가 지난달 말 개봉 당일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다투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에 마련된 치이카와 굿즈 매장에는 전날 밤부터 한국 한정판 상품을 사려는 인파가 몰려 현장 대기 번호가 1000번을 넘어섰다.
임희윤 대중문화 평론가는 “‘잘파 세대’에는 K팝이 서브, J컬처가 주류 문화로 부각되는 상황”이라며 “일본 문화에 대한 저항감이 없어진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 일본 싱어송라이터 바운디는 공연장을 가득 메운 1만5000명 앞에서 노래를 더 크게 따라 불러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운디의 요청에 화답하듯 관객은 ‘괴수의 꽃노래’를 일본어 가사 그대로 떼창했다.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2023년 개장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 J팝이 울려 퍼진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2월에는 ‘푸른 산호초’로 유명한 마쓰다 세이코가 찾았고, 일본 최고 톱스타로 불리는 기무라 다쿠야도 지난달 팬들을 만났다. K팝 공연의 성지로 유명한 1만6000석 규모의 서울 방이동 KSPO돔에서는 최근 킹 누, 오피셜히게단디즘 등 일본 아티스트 두 팀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의 세븐틴(5월)과 스트레이키즈(8월)가 일본 도쿄에서 대형 공연을 열며 K팝의 위상을 과시하던 즈음이었다.
왼쪽 사진은 지난 6월 서울 송파구 KSPO돔에서 열린 일본 아티스트 '킹 누' 공연(위쪽)과 지난달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바운디' 공연 모습. 코스케 이토·히요시 'JP' 준페이 제공
9일 공연예술통합전산망 등에 따르면 올해 1~9월 국내에서 열린 일본 아티스트의 공연 건수는 143건으로 4분기에 예정된 공연까지 더하면 197건에 이른다. 작년과 2024년은 각각 128건과 53건이었다. 올 상반기 국내에서 열린 대중예술 공연 건수가 269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J팝 공연의 성장세는 유별나다.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지니뮤직에서 올해 상반기의 J팝 스트리밍 횟수는 전년 동기보다 30%, 2년 전보다는 58% 늘었다. 유튜브 뮤직에서도 J팝 아티스트 요네즈 겐시의 ‘아이리스 아웃’은 작년 9월부터 8주 연속으로 ‘한국 인기곡 톱100’에서 1위를 지켰다. 지구촌에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면서 삽입곡 ‘골든’의 인기가 뜨거웠던 때였다. 올해에는 유튜브 뮤직 주간 차트에서 J팝 15곡이 동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J팝 인기의 배경으로는 넷플릭스, 유튜브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10~30대를 중심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폭넓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아이리스 아웃’은 국내 영화관에서 345만 명을 불러 모은 일본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의 삽입곡이다. 지난 6월 한국 KSPO돔에서 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킹 누는 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에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을 불렀다.
◇ K팝 성공 전략 벤치마킹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한국 ‘잘파 세대’는 J컬처를 주류로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넷플릭스의 대중화가 크게 한몫했다. 임희윤 대중문화 평론가는 “10년 전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J팝을 즐기는 취미는 숨겨야 할 ‘길티 플레저’(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즐거움)로 여겨지곤 했지만 지금은 떳떳한 취미가 됐다”고 분석했다.
K팝의 규격화된 문법에 싫증을 느끼는 젊은 층이 반대급부로 J팝을 찾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음원업계 관계자는 “K팝은 해외 작가들이 창작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세계화가 됐지만 그만큼 한국적인 인상이 약해졌다”며 “하지만 J팝은 일본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키면서도 국내 문화와 유사성도 커 한국 청년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일본 음악업계가 K팝의 글로벌 성공전략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칼각 군무, 화려한 카메라 워크 등 K팝이 성공시킨 ‘완성형 퍼포먼스’는 이젠 일본 신인 아이돌 그룹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 됐다.
황선업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은 “J팝 레이블이 쇼츠 플랫폼을 적극 공략하면서 한국 청중과의 거리감을 좁혔다”며 “서울 성수동 길거리에서 J팝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는 가게들은 3~4년 전엔 볼 수 없던 풍경”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