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평균율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복합적인 질문과 감정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밤하늘의 별 24개를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긴 여정을 함께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피아니스트 손민수
피아니스트 손민수는 8일 서울 용산구 사운즈S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발매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202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선보인 그는 2년 만에 다시 바흐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피아니스트들의 구약성서'로 꼽히는 바흐의 평균율이다.
바흐의 평균율은 서양 음악사의 근간이 된 걸작으로 평가된다. 바흐 이전의 작곡가들은 제한된 조성 안에서만 곡을 쓴 반면, 바흐는 이 작품을 통해 24개 조성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24개 조성마다 프렐류드(연습곡)와 푸가(하나의 주제를 여러 성부가 쫓아가며 발전시키는 곡)를 한 쌍씩 묶어 1권에 48곡, 동일 구성의 2권까지 더해 총 96곡을 담아냈다.
손민수가 다시 바흐에 주목한 것은 3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 러셀 셔먼의 영향이 컸다.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셔먼은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농담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언젠가 평균율을 녹음해야 하는데, 레슨을 하느라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8일 서울 한남동 사운즈S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바흐의 평균율을 연주하고 있다./사진=목프로덕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스승을 대신해 손민수가 건반 앞에 앉았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1년쯤 지났을 때였어요. (셔먼의 아내이자) 또 다른 제 스승인 변화경 선생님이 셔먼 선생님이 공부하셨던 바흐 악보를 건네주셨어요. 선생님의 자취가 남아있는 악보를 보니 너무나도 깊은 영감과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마치 옛날로 돌아가 다시 선생님께 레슨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셔먼에게서 배운 바흐의 가치는 손민수를 거쳐 제자 임윤찬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올해 초 발표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은 임윤찬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지만, 평균율을 포함해 바흐의 다양한 작품을 깊이 파고들도록 이끈 것은 스승 손민수였다.
평균율 가운데 돌림노래 형식의 푸가에는 요즘 시대를 바라보는 손민수만의 철학이 담겨있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고, 그 정보가 우리에게 빠른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정한 목소리가 도드라지면, 대다수의 다른 목소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가게 되죠. 하지만 바흐 음악에선 모든 목소리가 다 똑같이 중요해요. 아무리 작고 여린 목소리라도 들려야 하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목소리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손민수는 앨범 발매를 기념으로 연말까지 월드투어를 이어간다. 한국에선 오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을 포함해 천안, 대구, 부산 등 전국 8개 도시(11회)에서 리사이틀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