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세계병원연맹 회장에 취임하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한국에서 의료 인공지능(AI) 시대를 선도하려면 차세대 의료정보(EMR) 시스템을 하루 빨리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준 기자
내년 세계병원연맹 회장에 취임하는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한국에서 의료 인공지능(AI) 시대를 선도하려면 차세대 의료정보(EMR) 시스템을 하루 빨리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준 기자
“한국에는 지금이 의료분야 인공지능(AI) 강국에 오를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난 2일 만난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수차례 기회를 언급했다. 병원 혁신가로도 유명한 그는 내년부터 2년간 ‘세계 병원계 대통령’인 국제병원연맹(IHF) 회장에 오른다. 미국 존스홉킨스병원 등 세계 3만여 개 병원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국제기구다. IHF에 속한 각국 리더들이 오는 19~22일 서울 마곡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세계병원대회 총회(서울총회)에 집결한다. 이 자리에서 의료 AI 활용 기준 등을 담은 서울선언을 채택할 예정이다. 이 이사장은 “올해 총회는 AI 헬스케어 분야에서 중요한 마일스톤을 쌓는 행사가 될 것”이라며 “IHF 산하 AI 헬스케어 리더십 본부를 한국에 유치해 세계 병원을 연결하는 허브로 키우겠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지금 한국 의료인가요.

“20여 년 전만 해도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이 폐암 치료를 받기 위해 미국 휴스턴의 엠디앤더슨암센터를 찾았습니다. 당시 삼성의료원 의사들의 자존심이 상했지만 막을 수 없었죠. 인천 송도에 미국 국제병원을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입니다. 이젠 세계 병원들이 한국 병원을 서로 배우겠다고 합니다. 상전벽해죠. 한국 병원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습니다.”

▷서울총회 분위기가 뜨겁습니다.

“역대급 흥행이죠. 올해 IHF의 마흔아홉 번째 총회입니다. 등록자는 물론 포스터, 구연 발표 등이 가장 많습니다. 한국 병원 13~14곳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는데 신청이 넘쳐 추가로 병원을 열어달라는 요구가 쇄도하고 있죠.”

▷인력난·고령화가 병원계 화두입니다.

“부자 나라건 가난한 나라건 고령화로 의료비가 계속 늘고 있습니다. 유한한 재원 안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의료 시스템을 운영할 것인지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죠. 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나라는 부족한 의료 인력을 해외에서 확보하는 게 당면 과제입니다. 돈 없는 나라는 인력이 계속 유출되죠. 디지털 전환(DX), AI 활용도 큰 고민입니다.”

▷AI 활용에 소극적인 병원도 많습니다.

“기술 진화의 속도는 이미 거스를 수 없습니다. AI를 향한 문명사적 변화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산업계가 아니라 병원과 의사가 의료 AI를 이끌어야 합니다. 의료는 생명을 다룹니다. 윤리문제에 민감하죠. 사람과 환자 중심 AI를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헬스케어는 고부가가치 시장입니다. 의료인이 중심에 서야 윤리와 자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IHF가 AI 헬스케어 리더십을 끌고 갈 계획입니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해 총회는 이를 현실화하고 구체적 아젠다로 만드는 장이 될 겁니다.”

▷한국 의료 AI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미국 메이요클리닉, 클리블랜드클리닉에서 한국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인도 아폴로병원, 싱가포르종합병원도 마찬가지죠. 한국이 이렇게 잘나가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AI 문명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섰습니다. 시대적으로 한국은 이를 선도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IHF 산하 AI 헬스케어 리더십 본부를 한국에 설치하겠다고 해도 이견이 없습니다. 한국이 표준을 세우고 시금석을 구축하는 게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죠. 메이크센스(Makesense)입니다.”

▷시대적 흐름이란 의미인가요.

“K컬처를 보세요. 20년 전 박진영 씨가 원더걸스 데리고 뉴욕에 갔을 때 모두 비웃었습니다. 가당치 않은 얘기라고 했죠. 싸이가 갑자기 인기를 끌었을 때도 우연이라고 했습니다. 이후 갑자기 BTS가 나왔습니다. 이젠 한국 가수는 누구나 해외에 나가는 시대죠. 세계인이 모두 한국말을 따라 합니다. BTS의 팬덤인 아미가 조직돼 몇억 명의 팬이 생겼죠. ‘국뽕’이 아닙니다. 한국 자체가 팬덤이 됐습니다. 누구도 이런 상황이 어떻게 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도 모르죠. 대중문화만 통하나 했더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보건의료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AI 패권 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결국 데이터입니다. 모든 국가가 같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IBM이 야심 차게 출시한 의료 AI 왓슨은 이제 아무도 쓰지 않죠. 실패 원인은 결국 데이터입니다. AI 학습에 활용된 데이터가 정제되지 않은 데다 너무 낡았던 게 문제입니다. 의학은 계속 발전하고 바뀌는 학문입니다. 최신 도구로 활용할 AI가 쓸모없는 쓰레기 데이터만 학습한 것이죠. 많은 데이터를 모두 선택한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무슨 데이터를 어떻게 구축할지가 중요합니다. 건강보험 시스템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론 AI를 정교하게 학습시킬 수 없습니다.”

▷진료 데이터가 더 중요해지겠네요.

“치료 현장 데이터를 모아야 합니다. 기존 의료정보(EMR) 시스템으로는 모을 수 없습니다. 병원마다 다른 EMR을 활용하고 있어서죠. 운영체제(OS)가 모두 제각각이라는 의미입니다. 정부가 공공 EMR을 만들어 표준화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이를 활용하는 병원이 많지 않습니다.”

▷벤치마킹할 해외 사례가 있나요.

“태국은 인구의 90%가량이 같은 개인의료정보(PHR) 시스템을 씁니다. 과거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때 SNS 앱에 PHR을 깔도록 했죠. 여기에 의약품 처방 및 배송 시스템까지 연결했습니다. 원격 진료를 받으려면 모두 같은 시스템을 쓰도록 설계한 겁니다.”

▷정부와의 협력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AI 대전환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AI를 활용하는 시대죠. 헬스케어 분야에서도 구체적 액션이 필요합니다. 시급한 과제는 AI까지 연동한 차세대 EMR입니다. 이를 개발하는 데 2조원 넘게 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별 병원의 자본 수준으론 감당할 수 없죠. 정부와 병원, 기술기업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정부가 지원하고 시스템이 개발되면 모든 병원이 활용하겠다고 약속하는 모델이 가장 이상적이죠. 새로운 퍼블릭 프라이빗 파트너십(PPP)을 구축해야 합니다.”

▷그간 많은 예산을 썼는데요.

“매번 돈만 뿌려주고 결실은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병원마다 수백억원씩 나눠준 뒤 선도 병원을 만들고 경쟁시켰죠. 국립대병원, 공공병원 등 병원 몇 곳에서 쓰고 흐지부지됐습니다. 계속 이런 상황만 반복해선 안 됩니다.”

▷AI에는 100조원씩 투자될 예정입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황이 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통합적 리더십이 필요할 때입니다. 의료기관의 기초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올리면 진짜 의료 AI 선도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세계 병원이 다 한국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한국이 AI 선진국이잖아’라면서 새 모델을 내놓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 내부엔 인프라부터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AI 시대에 맞게 병원 리더십 수준을 끌어올리려면 지금 움직여야 합니다. 거대하고 담대한 통합적 리더십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기회죠.”

▷시스템 수출도 가능하겠네요.

“한국에서 AI를 잘 활용할 수 있는 EMR 시스템을 개발하면 개발도상국, 저개발국가 등에 이를 수출하는 것도 가능하죠. 한국의 플랫폼이 깔리면 헬스케어, 의료기기 등 다른 유관 수출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순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대형 대학병원은 물론 중소병원까지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국민의 건강 데이터, 진료 데이터 등도 모두 하나의 시스템에서 가동해야 하죠. 의료 분야 정보기술(IT) 신경망을 새로 구축하는 빅프로젝트입니다. 여기에 건강보험까지 얹으면 미래형 의료 공급 시스템을 바꾸는 데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보건의료 난제도 해결 가능할까요.

“급격한 고령화와 인력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AI 기술 외엔 답이 없죠. 고비용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균형 있는 공급 구조, 의료서비스 구조를 갖추기 위해 AI는 꼭 필요합니다. 디지털 전환, AI 활용이 늦어지면 의료 생태계는 계속 가물어갈 겁니다. 재원이 없고 인력도 부족합니다. AI를 빠르게 도입하는 국가와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결국 도태될 겁니다. 고령 인구를 보살피는 케어 로봇, 의료인의 반복 업무를 줄여주는 로봇 등은 AI가 이끌 유토피아적인 미래 기술이죠. 정부와 병원, 산업계가 모여 통 큰 비전을 현실로 만든다면 한국은 충분히 리더 국가가 될 수 있죠. AI 전환 속도가 빨라지면서 강소국가의 시대가 왔습니다. 유럽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등의 성장은 이를 보여주는 사례죠. 의료 AI는 ‘진짜 아시아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겁니다.”

■ ‘세계 병원계 대통령’ 이왕준 이사장은

전북 전주에서 나고 자란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은 내과 개원의인 부친을 보며 의사의 꿈을 키웠다. 1983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 뒤 졸업을 앞둔 1992년 의료신문 ‘청년의사’를 창간해 28세 최연소 발행인이 됐다. 외과 전문의가 된 직후인 1998년 외환위기로 부도난 인천사랑병원(옛 세광병원)을 인수했다. 이 병원을 키워 마련한 자금을 토대로 2009년 명지의료재단을 품에 안았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20년 코로나19 등 신종 감염병 위기 때 대한병원협회 대응단장과 총괄본부장을 지냈다. 재단법인 서재필기념사업회 이사장,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